프랑스의 톨레랑스는 유대인 앞에서 멈춘다
  • 파리∙이유경 통신원
  • 호수 607
  • 승인 2019.05.09 10: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의 반유대주의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유대인 묘지가 훼손되고, 유대계 인사가 협박을 받고 있다. 극우 단체의 선동, 프랑스 내 무슬림과의 갈등 등이 이유로 꼽힌다.

현재 프랑스 내 유대인은 약 50만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세워 유대인을 추모하고 반유대주의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등 유대인 정책에 각별히 신경 써왔다. 유대인에게 공연히 모욕을 주면 1만2000유로 상당의 벌금을 물리고, 명백한 반유대주의 행위에 대해서는 최대 징역 1년형 혹은 4만5000유로의 벌금형을 내린다. 유대인 묘비나 교회당을 파손하는 등 신성모독 행위에는 최대 3년 징역 혹은 4만5000유로 벌금에 처한다.

프랑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양면적 모습을 보인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유럽 최초로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나라가 프랑스다. 반면 1894년 유대인 사관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워 군 기밀을 넘긴 혐의로 종신유형을 내린 나라이기도 하다. ‘드레퓌스 사건’은 작가 에밀 졸라를 필두로 한 당대 지성인들의 고발과 여론의 동조로 12년 만에 유대인의 억울한 혐의를 벗겨낸 역사적 사건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친(親)나치 비시 정부는 프랑스 유대인들을 직접 독일 수용소에 보내기도 했다.
 

ⓒAP Photo2월19일 카첸하임의 유대인 공동묘지 내 비석들이 나치 문양 낙서로 훼손됐다.

법률적 제어와 기념관 등을 통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는 심해지고 있다. 극우 단체의 배타적 행위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인한 프랑스 내 무슬림과의 갈등, 그리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유대계 자본 투자은행인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근무했다는 점이 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현지 언론이 인용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30%는 ‘유대인이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60%는 ‘유대인이 지나치게 강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지난해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행위가 전년에 비해 74% 급증하기도 했다. 올해만 해도 반유대주의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 2월 파리의 한 제과점 유리에 ‘유대인(Juden)’이라고 쓰인 낙서가 발견됐다. 이튿날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대받아 사망한 청년 일란 알리미를 추모하는 나무가 뿌리째 잘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정치인인 시몬 베이의 초상이 그려진 우편함에 나치 문양(하켄크로이츠) 낙서가 덧칠된 사건도 일어났다. 2월15일에는 청소년 두 명이 파리 근교 사르셀 지역의 유대교회당에서 공기총을 발사하는가 하면, 다음 날 토요일 ‘노란조끼’ 집회 도중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자 유대계 철학자인 알랭 팽켈크로에게 한 집회 참여자가 “더러운 시오니스트” 따위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용의자는 경찰에 유치됐고, 5월22일 재판받을 예정이다.

팽켈크로가 모욕당한 사건은 학계뿐 아니라 정치계와 언론계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난 2월16일 ‘프랑스 앵포’ 라디오 인터뷰에서 공화당 의원 기욤 라리베는 “팽켈크로는 프랑스 정신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에게 피해를 준 반유대적 공격은 처벌받아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팽켈크로의 사례는 사회당 대표 올리비에 포르가 추진한 반유대주의 반대 집회 규모가 커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과 극좌 정당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프랑스 앵수미즈)’를 제외한 14개 당에 집회 참여를 촉구했으며,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 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와 프랑수아 올랑드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4월12일 내무장관 크리스토프 카스타네르는 “반유대주의가 독처럼 퍼지고 있다. 한 종교와 일란 알리미의 추모를 공격하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을 공격한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역시 적극 나섰다. 마크롱 대통령은 2월19일 카첸하임의 유대인 묘지를 방문하고 파리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추모 일정을 가졌다. 전날 밤에도 알자스 지방 바랭주의 카첸하임 유대인 묘지의 80여 개 비석에는 나치 문양 낙서가 새겨졌다. 그는 카첸하임을 방문해 “정부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법으로 처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유대인단체대표회의(CRIF)의 연례 만찬에서 반유대주의 대책안을 발표했다. 네오나치, 백인우월주의 단체를 해산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와 같은 온라인 내 혐오 발언 규제를 강화하는 게 골자다.

그런데 마크롱 대통령이 발표한 대책 중 ‘반유대주의 정의 확대안’은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철학자 팽켈크로가 “더러운 시오니스트”라는 모욕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반유대주의의 개념을 반시온주의까지 넓혀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시온주의는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으로, 반시온주의는 최근 이스라엘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인정된 점을 고려하면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마크롱 대통령은 반시온주의를 반유대주의 개념의 일부로 인정한 이유를 “프랑스의 공권력, 사법관 그리고 교육자들이 유대인 혐오와 이스라엘 부정을 자세히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밝혔다. 2016년 가결된 국제홀로코스트추모위원회(IHRA)가 추진한 정의 확장 투표에 대한 실행안이기도 하다.

마크롱, 형사처벌에 대해선 유보적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형사처벌에 대해선 유보적이다. 이미 프랑스 국회에 올라와 있는 반시온주의 발언 처벌 법안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진하는 공화국(LREM)’ 의원 실뱅 마야르는 반시온주의 형사처벌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혐오는 유대인들을 혐오하는 새로운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의원 에리크 코크렐은 프랑스 앵포와 인터뷰하면서 “반무슬림주의나 반유대주의가 되지 않고도 이슬람 신권정치를 비판할 수 있듯, 사람들은 네타냐후(이스라엘 총리)의 정치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가 프랑스 학생 100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유대계 학생 89%가 학교에서 반유대적 행위를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비유대계 학생 45%도 반유대 행위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지난 3월 스트라스부르의 유대교회당 기념비가 파손되었고, 루아르 지역 의원인 소피 로스트코프는 3월27일 창고에 “유대인 소피 로스트코프는 죽어라”고 쓰인 낙서로 위협을 받아 신고했다. 4월 초 리옹에서도 반유대적 낙서들이 발견됐다.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