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 김연희 기자
  • 호수 606
  • 승인 2019.04.2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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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사건의 목격자인 윤지오씨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힘닿는 대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다. 윤지오씨의 공개 증언으로 검찰 과거사위의 진상조사 기간도 늘어났다.

시작 전부터 사람이 몰렸다. 4월14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 좌석 113개는 이미 만석이었다. 보조의자가 동원됐다.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홀 뒤쪽으로 방송사 카메라가 빼곡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주최로 지난 3월 출간된 <13번째 증언> 북콘서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리는 자리였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선 윤지오씨의 단발머리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한 분 한 분 평생 기억하도록 하겠다. 솔직히 지난 10년간 한탄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섣불리 (신원을 공개하고) 나오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러면 13번째 증언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

10년 전 스물두 살 윤씨는 ‘장자연 사건’의 참고인 중 한 사람이었다. 2009년 3월7일 목숨을 끊은 신인 배우 장자연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술접대·성상납을 강요당했다는 내용의 문건을 남겼다. 언론사 사주, 유명 드라마 PD 등이 언급된 ‘장자연 리스트’는 연예계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고발장이었다. 수사가 시작되자 피의선상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장씨를 모른다고 하거나 혐의를 부인했다. 장자연씨와 함께 더컨텐츠엔터테인먼트의 신인 배우였던 윤씨만이 장씨의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참고인인 윤씨를 12회나 불러 조사했다. 윤씨는 ‘이순자’라는 가명으로 밤늦게 시작해 새벽에 끝나는 강도 높은 수사에 임했다. 2018년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검찰 과거사위) 진상조사단이 장자연 사건 재조사에 착수한 이후에도 윤씨의 증언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씨는 ‘김지연’ ‘윤모씨’라는 호칭으로 신분과 얼굴을 숨겨왔다.


ⓒ시사IN 이명익윤지오씨는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10년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윤씨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20대 후반, 배우로서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계약하려 했던 대형 기획사의 대표로부터 ‘성상납’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이를 거절하자 대표는 윤씨에게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라고 말했다. 윤씨는 <13번째 증언>에서 “(장자연) 언니의 죽음으로도 세상은, 아니 연예계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라고 썼다. 그래서였다. 윤씨는 결국 지난 3월5일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같은 날 윤씨가 쓴 책 <13번째 증언>도 세상에 나왔다. “2009년 수사 당시 최선을 다해 조사에 협조했지만 묵인돼버렸다. (세상에 대한) 신뢰를 크게 잃었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가면서 재조사가 시작됐다. 23만명이나 되는 국민들이 여전히 자연 언니의 죽음을 한탄스럽게 생각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시사IN> 제600호 ‘넌 발톱의 때만큼도 모른다고 하더라’ 기사 참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윤씨는 뉴스, 라디오 방송, 시사 프로그램, 신문, 온라인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힘닿는 대로 인터뷰에 응했다. 3월15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리해서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분명 가해자가 단 한 번이라도 볼 거라고 생각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장자연 사건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장자연 문건은 언론에 공개된 4장 이외에 리스트 형태로 된 부분이 더 있었다. 윤씨는 2009년 장자연씨 유족이 봉은사에서 문건을 태우기 전에 전문(全文)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윤씨를 통해 이 리스트에 한 언론사 사주 일가의 같은 성을 가진 사람 세 명, 유명 PD와 감독, 이름이 특이한 국회의원 등 사회 유력 인사들 이름이 쓰여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2009년 수사 때 검찰과 경찰은 이 부분을 묻지 않았다. 윤씨는 3월12일 검찰 과거사위 진상조사단에 나가 관련 내용을 진술했다. 3월18일에는 장자연씨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조 아무개 전 <조선일보> 기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2009년 수사 당시 윤지오씨는 가라오케에서 조씨가 장자연씨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지만 검찰은 조씨를 무혐의 처분했다. 지난해 검찰 과거사위가 출범하면서 조씨는 9년 만에 재판에 넘겨졌다.

공개 증언에 나서며 윤씨는 ‘생존 방송’을 시작했다. SNS나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자신이 무사함을 알리고, 시청자들이 윤씨의 안전을 지켜주는 일종의 ‘셀프 CCTV’였다. 이 생존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은 공익제보자가 겪는 제도적·심리적 어려움을 생생히 목격하기도 했다. 윤씨는 2018년 JTBC와 익명 인터뷰를 한 이후 당시 살고 있던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두 차례 당했다고 했다. “전화 인터뷰에서 책을 쓴다고 한 시점부터 제 행방을 추적하는 분들이 있었다. 어떤 언론사였다. 저는 A4 용지 한 장(사라진 장자연 리스트)을 넘어가는 분량의, 30명 가까운 분들을 상대해야 한다(2019년 4월11일, JTBC <뉴스룸> 인터뷰 중).”

신변 보호 위해 ‘생존 방송’ 하기도


신변 보호를 위해 경찰에서 지급한 비상호출용 스마트워치가 작동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윤씨는 3월3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현재 스마트워치로 신고한 지 약 9시간39분이 경과했는데 아무 연락이 되지 않는다’라며 불안감을 토로했다. 윤씨는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24시간 동행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간 다음 날 경찰은 여경 5명으로 특별팀을 구성해 윤씨를 보호하고, 공익제보자에 대한 신변보호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당초 검찰 과거사위의 장자연 사건 재조사는 3월 말 종료될 예정이었다. 3월12일 검찰 과거사위는 “진상조사단 활동을 추가로 연장하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과거사위 소속 진상조사단에서 “충실한 조사를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전달했지만 과거사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증언자 윤지오의 등장은 예정된 결말을 뒤바꾸는 데도 일조했다. 3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은 “검·경의 명운을 걸고 장자연·김학의·버닝썬 사건을 낱낱이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3월19일 검찰 과거사위 진상조사 활동을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10년 전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딱 두 달 더 늘어났다. 윤씨는 조만간 가족이 있는 캐나다로 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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