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한편에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다. 할 일 목록이다. 요즘 자주 깜빡깜빡한다. SNS, 포털, 메일, 텔레비전, 신문, 잡지…. 정보 홍수에 허우적댄다. 정보 범람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1980년 5월과 2014년 4월이다. 한 번은 현장에서 목격했고 한 번은 미디어를 통해 지켜보았다.

2014년 4월 그날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었다. ‘전원 구조’에 안도하고 오보임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는 텔레비전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고, 누구는 자신의 아이를 꼭 안아주며 슬픔을 나눴다. 우리는 모두 그날을 기억한다.


유독 그날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가 있다. 수인번호 503. 피고인 박근혜. 그날 자신이 뭘 했는지 한 번도 제대로 진술한 적이 없다. 변호인단이 탄핵 심판 과정에서 4월16일 행적에 대해 헌재에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2018년 검찰 수사 결과 이 의견서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검찰에 따르면, 그날 오후 2시15분께 최순실씨가 문고리 3인방과 관저에서 회의를 주재할 때까지 피고인은 침실에 머물렀다. 컨트롤타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박근혜 청와대 인사들은 공문을 조작했고, 법정에서 위증을 했다.

이렇게 법원도 헌재도 무시했던 그가 웬일인지 법에 기대 구제를 청했다. 피고인 박근혜의 구속 만기일은 4월16일이었다. 다음 날 기결수 신분으로 바뀌어 재판을 받는 그는 변호인을 통해 형집행정지 신청을 검찰에 냈다. 같은 날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여성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석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황 대표는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로부터 진실 은폐에 앞장섰다고 지목당한 장본인이다.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 검찰에 해경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빼라는 지시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자유한국당 일각에서 나오는 박근혜 피고인의 석방 요구를 보며 헌재 결정문이 떠올랐다. 2017년 3월 김이수·이진성 헌재 재판관이 16쪽 분량의 보충의견에 담은 세월호 관련 내용이다. 두 재판관은 “참사 당일 시시각각 급변하는 상황에 관한 파악과 대처 과정에서 자신의 법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아니함으로써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 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를 위반했다”라고 보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되어 대규모 피해가 생기거나 예견되는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음에도 상황의 중대성 및 급박성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피청구인의 대응은 현저하게 불성실하였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검찰 수사, 재판, 그리고 탄핵 심판 과정에서 박근혜 피고인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단 한마디도 사과하거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두 재판관의 보충의견서를 책상 한쪽에 두고 있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