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가보았던 도시는 볼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가게마다 가득 찬 상품과 더불어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간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함석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입체적으로 글씨를 크게 써 걸어놓은 대단치 않은 간판이었다. 당시에는 좋은 읽을거리이자 구경거리였다. 상회, 공작소, 제과점, 식당, 제화점… 간판들이 줄지어 있었다. 가끔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간판도 있었다.
도시에 나와 살면서 간판은 공해의 일부가 되어갔다. 시내 중심가나 새로운 상가 건물이 들어서면 어느 곳이나 간판으로 도배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건물 형태와 색은 사라지고 간판이 뒤덮여 이룬 세계는 일종의 경이감마저 주었다. 나를 좀 보아달라는, 이리로 오라는 유혹이자 공포였고 간판은 시각적 괴로움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이런 괴로움을 줄이고자 가이드라인 제시 등 행정기관이 여러 방법을 동원해 간판에 대한 규제를 하면서 조금 나아진 듯도 하다.
이제 간판들을 보면 자영업자의 비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영업자 비율은 다른 말로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영업 폐업률이기도 하다. 아마도 간판의 생산과 폐기라는 회전 비율도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적잖은 돈이 들어간 간판이 내려지고 새로운 간판이 달리는 것은 보기만 해도 씁쓸하다. 몇 년 사이에 동네 가게 하나가 잡화점에서 분식집, 추어탕집, 콩나물국밥집으로 연달아 바뀌는 걸 보았다. 간판이 바뀌었다는 것은 폐업한 자영업자가 또 늘었다는 뜻이다.
일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놀라운 간판
이런 가운데 가끔 일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놀라운 간판이 눈에 띌 때가 있다. 특히 그 간판이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라 가게 주인의 솜씨일 때 더욱 그렇다. 서울 한 곳에서 만난 이발소 간판이 그랬다. 이발관 이름은 거의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 만들어 붙인 글씨와 이미지들이 이발소 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인의 이름, 기술 본위 등의 글씨는 한자로, 일부는 철자가 잘못되기도 한 영어로, 나머지는 한글로 되어 있었다. 특히 강조한 것은 ‘기술 개발’ ‘정직’ ‘에어컨 가동’ 등이었다. 아마 주인이 스스로 디자인을 하고 칼과 가위로 글씨를 잘라 창과 커피 자판기에 가득 붙여놓았을 것이다.
이른바 공간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한 발로이다. 공간 공포심이란 인간 본능의 하나로 낯설고 비어 있는 공간을 자기화하기 위해 그곳에 뭔가를 채워넣으려는 욕망을 말한다. 이 욕망은 미술 작품을 낳기도 하고 빈 벽을 가득 채운 낙서로 변질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발소 전면과 커피 자판기까지 가득 채운 빨강, 파랑, 노랑색 글씨와 장미 문양, 가위 모양 등등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다 읽어볼 수 있었다. 건물 앞에 세워놓은 웬만한 조각 작품보다 흥미로웠다.
물론 이런 간판이 도처에 있다면 심히 괴로울 것이다. 어쩌다 드물게 있어서 돋보이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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