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생태계의 ‘변종’이 나타나다
  • 고재열 기자
  • 호수 604
  • 승인 2019.04.1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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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무용단 모던테이블은 <다크니스 품바>를 25일 동안 총 30회 공연한다. 사흘 공연이 마지노선인 한국 무용 생태계에서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있는 김재덕 안무가를 만났다.

한국의 무용 공연은 사흘이 마지노선이다. 보통 사흘 정도 제작할 수 있는 공연 지원금을 받기 때문이다. 간혹 내한 발레 공연이 이 한계를 뛰어넘기도 하지만 전통무용이나 현대무용 모두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흘을 넘지 못한다. 장기 무용 공연은 없다.

3일 동안 하는 공연도 좌석을 채우기 힘들다. 그래서 서로 품앗이를 한다. 무용 공연 뒤에는 무용수들이 로비에서 길게 수인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왔다 갔다는 걸 서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스승의 공연에 제자가 오고 그 제자의 제자들이 교복을 입고 따라온다. 일종의 예술 피라미드인 셈이다.

이런 무용 생태계에 ‘변종’이 나타났다. 무려 25일 동안 총 30회 공연을 하겠다는 무용단이 있다. 3월28일부터 4월21일까지 <다크니스 품바>(CKL 스테이지)를 공연하는 현대무용단 모던테이블이다. 25일 동안 공연할 수 있는 저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정도의 팬덤을 갖고 있는 지, 아니면 후원·협찬을 넉넉히 받은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공연장을 찾아가보았다. 프로그램 책을 보니 <다크니스 품바>가 공연되었던 국내외 무용제와 축제의 이름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2006년 초연 이후 산소호흡기처럼 무용제와 축제에서 지원금을 받아가며 13년을 버틴 공연이었다(총 120여 회 공연). 대부분 공모를 통해 선발되었을 테니 수십 번 오디션을 본 셈이다.


ⓒ모던테이블 제공<다크니스 품바>(사진)는 학대와 멸시를 춤과
노래로 푼 <품바>를 현대무용으로 재해석했다.

모던테이블의 리더인 김재덕 안무가를 만났다. 장기 공연의 비결을 묻기 전에 그의 하소연을 먼저 들어야 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다. 이런 기회가 꼭 있길 바랐다.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줄 사람들이 와주길 기대했다. 스스로 무용계 밖으로 나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이런 시도는 의미가 없다.”

장기 공연의 비결은 없었고 비결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모함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30회 공연을 할 만큼 단단한 팬덤이 없다. 그런 팬덤을 조성하기 위해 이 공연을 하는 것이다. 공모사업으로 선정된 일회성 공연으로는 팬층을 확보하기 힘들다. 한번은 우리를 던져야 한다 각오했고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용 작품을 위한 답을 무용계 밖에서 찾기로 하고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다.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다들 칭찬은 한다. 거기까지다. 순수 무용은 미디어의 도움을 받기 힘든 장르다. 미디어에서 점점 소외된다. 청각 콘텐츠는 여운이 오래 남는 데 비해 시각 콘텐츠는 여운이 별로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에게는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던져보았다.”

<다크니스 품바>는 김 안무가가 대학원 재학 시절인 2006년에 처음 만든 작품이다. “작품을 본 교수가 공모전에 내보라고 해서 응모했는데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1등을 못하고 심사위원상을 받았는데 그 상을 적극 추천했던 세이지 다카야 도쿄 트리엔날레 예술감독이 나를 초청해서 해외 공연을 처음 할 수 있었다.”

공연은 또 다른 공연의 계기가 되었다. 공연을 본 다른 행사 관계자들의 초대가 이어졌고 그렇게 작품의 생명력이 되었다. “공연 현장에서 바로 캐스팅되며 해외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동유럽에서 가장 큰 모스크바 체호프 국제연극제에도 초대되었다. 그들이 축제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어서 반복해 참가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매력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겼다. 무용계 밖에서 필요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에서 벗어날수록 호응이 컸다.”

ⓒ시사IN 이명익김재덕 안무가(위)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무용단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책으로 꼽았다.

파격적 소재, 도발적 표현 방식

<다크니스 품바>는 배고픔에 대한 이야기다. 육체의 배고픔과 정신적 결여를 무용수가 몸으로 표현한다. 학대와 멸시를 춤과 노래로 푸는 품바를 현대무용으로 재해석했다. 흥과 신명이 있는 공연으로 ‘모던 무당’이 된 무용수들이 현대무용이라는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전통무용에 들이댔다. “원래 20분이던 공연을 2015년에 1시간 공연으로 늘렸다. 마르셀로 자모라 중남미축제연합회(LA RED) 회장이 바뀐 작품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그전에는 익사이팅하고 판타스틱했는데 지금은 포이트리하다(시적이다)’고. 작품에 강약을 준 것이 더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다크니스 품바>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짜임새다. 무용수들이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김 안무가는 그런 팀플레이가 가능해진 비결로 시스템과 인문학을 들었다. “싱가포르 T.H.E 댄스컴퍼니 상임안무가로 활동할 때 보니 그곳 디렉터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체계적으로 일하더라. 그래서 나도 따라 했다. 2013년까지는 ‘김재덕 프로젝트’로 했던 공연을 2014년부터 모던테이블이라는 정식 무용단을 만들어 올렸다. 무용수들에게 매일 출근하자고 했다. 함께 몸을 풀고 레퍼토리를 연습하고 같이 밥을 먹으며 연습했다. 그렇게 해야 팀이 만들어지고 우리들만의 사적 용어가 생겨 제대로 된 앙상블을 이룰 수 있다.”

팀원들을 이끌 때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인문학이었다. 작품 활동에 도움을 준 인문학 책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꼽았다. “무용단은 리더와 단원들이 다툴 일이 많다. 그런 다툼을 줄여준 책이다. 무용학 박사 과정을 할 때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과 수업인 독불철학, 영미철학, 윤리학 과목을 두루 들었다. 그리고 밤새워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 못하던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는 게 스스로 놀라울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에게 선물한 것은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고 ‘이래서 내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오류가 생겼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말은 그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말이 체화된다. 이후로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대화를 했다. 이를테면 ‘어깨를 좀 더 강렬하게 움직여달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어깨를 3㎝ 정도만 더 움직여달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낫다. 요구를 할 때는 범위를 좁혀줘야 한다.”

<다크니스 품바>는 소재도 파격적이지만 표현 방식도 도발적이다. 장르 간 장벽을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공연이다. 무용의 언어는 움직임이다. 음악은 배경으로만 쓰일 뿐이다. 그런데 김 안무가는 음악을 작품의 중심에 깊숙이 끌고 왔다. “음악이 아닌 것도 음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춤이 아닌 것도 춤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래는 입으로 추는 춤, 목소리로 추는 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부정하면 현대무용가가 아니다. 내가 작곡을 할 수 있어서 작품에 필요한 노래를 직접 만들었다.”


ⓒ모던테이블 제공/div>2017년 모스크바 체호프 국제연극제에서 <다크니스 품바> 공연을 마친 모던테이블 단원들이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사용할 때 김 안무가가 방점을 찍은 쪽은 전통보다는 ‘현대적’인 것이었다. “판소리를 록처럼, 판소리를 블루스처럼 부르고 싶었다. 장구나 꽹과리 소리가 안 나도 우리 음악이라고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신해철의 <모노크롬> 앨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록 음악을 하는 데 이런 것까지 한국적으로 할 수 있구나’ 감탄했는데 우리도 그런 톤을 유지했다. 팝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크니스 품바>는 ‘국민 무용’ 될까

장기 공연을 위해 그가 꺼낸 승부수는 뮤지컬 배우 정원영씨를 캐스팅한 점이다. 뮤지컬 <인 더 하이츠>에 함께 출연한 정씨를 눈여겨보았다가 이번 공연에 캐스팅해서 자신과 주연을 번갈아 맡도록 했다. “정원영씨는 전문 무용수가 아니라서 안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무용의 기본은 내 몸을 더 잘 아는 것이다. 원영씨 동작을 만들 때는 무용 미학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가 일상적으로 쓰는 제스처에 주목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동작이 있다. 그걸 확장하고 연결하고 끊어서 무용 언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안무가의 역할이다. 다행히 잘 따라왔다. 원영씨 팬들이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보통 무용 공연은 초반에 분위기를 한껏 잡는다. 관객을 긴장시켜놓고 공연을 시작하는 것이다. 김 안무가는 그런 과정을 포기하고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작품을 직접 설명한다. “가요는 부모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운다. 무용은 그런 기회가 없다. 보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미궁 속으로 빠질 수 있어서 어렵게 느끼지 않도록 먼저 설명을 한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나 <점프>의 특징은 에너지가 넘친다는 점이다. <다크니스 품바>도 마찬가지다. 마치 축구 경기를 하듯 60분 동안 무용수들이 전력 질주하는 공연이어서 체력 소모가 크다. 김 안무가도 체력 관리에 가장 신경을 쓴다. “5일 공연을 해본 적은 있지만 이런 장기 공연은 처음이다. 첫 주 공연이 끝나고 한 단원이 종잇조각 들 힘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정말 살기 위해 먹는다. 단원들에게 하루 다섯 끼씩 먹고 잠 많이 자라고 한다. 나도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병원에 갔더니 구내염이 생겼다고 하더라. 하모니카를 불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피곤한 몸보다 더 힘든 것은 공연을 둘러싼 상황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공모사업에 선발되어 대관료는 지원을 받지만 제작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이 8부 능선을 넘으면 <난타>나 <점프>와 같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을 수 있겠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너무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대관료를 안 내도 30회 공연을 하려면 대략 1억1000만원이 필요한데 이 중 4000만원만 후원받았다. 나머지는 티켓을 팔아서 만회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난망하다. 아직 대출금을 갚지 못했는데 빚이 더 늘게 생겼다.”

그래도 관객들의 호응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에 굿즈를 여러 가지 만들었다. 젓가락을 이용한 움직임이 있어서 젓가락 굿즈도 만들어보았다. 이게 팔릴까 싶었는데 신기하게 팔리더라. 공연 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굿즈를 공연을 보고 나면 한두 개씩 산다. 첫 주 공연 나흘 동안 65만원어치가 팔렸다. 작지만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금액이다.”

<다크니스 품바>는 ‘국민 무용’ 작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김 안무가는 자신했다. “얼마 전 무용계 원로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 첫마디가 ‘존경스럽습니다’였다. 무용하는 이들은 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도전인지를. 이것이 마지막 계단이라 생각하고 한번 넘어서보려 한다. 우리 무용계에는 이름을 남긴 무용가는 있지만 이름으로 기억되는 무용 작품은 없다. 우리가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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