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 말고도 3·1운동 이후 곳곳에서 ‘임시정부’ 깃발이 솟았던 것을 알고 있니?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건 러시아령 연해주의 조선인들이었어. 이동휘·문창범·김철휘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은 대한국민의회를 만들어 행정부를 조각한 뒤 발표했지. 이게 1919년 3월17일의 일이었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11일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깃발이 올랐고, 4월23일에는 식민지 조선 땅 한복판,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중국음식점 봉춘관에서 13도 대표 25인이 국민대회를 열어 ‘한성 임시정부 약법’을 제정하고 ‘한성 임시정부(한성정부)’를 선포하게 돼.

한성정부의 출발은 1919년 4월2일 인천 만국공원(현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대회’였어. 3·1운동의 여진이 조선 반도를 뒤흔들던 무렵이었으니 일제 당국의 감시가 엄청나게 독살스러웠겠지. 조선 13도 각지에서 은밀하게 모여든 이들은 독립의 열망에 들떠 있었어. “우리 동지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도록 손가락에 흰 종이나 흰 헝겊을 감으시오.” 나이 마흔셋의 변호사 홍진도 손가락에 흰 천을 싸맨 사람 중 하나였어.

ⓒ연합뉴스1942년 10월 구성된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홍진.

홍진은 전직 대한제국 법관이었어. 1903년 2월 스물일곱 살 때 법관양성소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대한제국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임용됐지. 검사로서 그가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상부의 질책을 통해 검사 홍진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어. “사전심리보고(赦典審理報告)에 심신(審愼)치 못하야 착오함이 많으므로 시(是)로 이(以)하야 견책에 처함(한시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요즘 말로 옮기면 “(죄인) 사면 규정을 적용하는 데 성실하지 못해서 실수가 많으므로 견책에 처한다” 정도가 되겠다.

그런 견책을 받고도 홍진은 1907년 강도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들의 감형을 요청해. 알다시피 검사는 죄인을 변호하는 직책이 아니라 그 죄상을 준열히 밝히고 상응하는 형벌을 요청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홍진은 종신 징역수를 감형해달라 요청하고, 사면 관련 규정을 대단히 폭넓게 적용해 죄인을 놓아주는 ‘착오’를 범하는 괴짜 검사였던 셈이지. 왜 그랬을까? 정확하지는 않으나 어떤 학자들은 홍진이 근무하던 충북 지역이 의병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었음을 주목한다. 그 지역 의병들은 제천을 점령하고 충주성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했는데 당연히 많은 이들이 체포돼 감옥에 갇혔겠지. 홍진은 그들을 극력 옹호했던 거야. 급기야 그는 “변호사로서 법정 투쟁을 위해 의병 사건의 논고를 거부하고 검사직을 사임(한시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하지.

경술국치 이후 홍진은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1919년 3월1일 독립 만세 대폭발에 이르자 그 열기 속에서 독립운동의 대열에 뛰어들게 돼. 인천 만국공원의 13도 대표자 대회 후 상하이 임시정부 결성 소식을 들은 그는 한성정부 선포를 동지들에게 맡기고 한성정부 요인 명단과 취지서 등을 품은 채 압록강을 넘는단다. 이미 불혹을 넘어선 나이, 명문가에서 태어나 법관을 지내고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먹고살 걱정은 평생 해본 적이 없었을 테고, 고생과도 거리가 멀었을 한 중년의 팔자가 극적으로 유턴하는 순간이었지.

한때 일본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이미 임시정부를 차리고 있던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성정부의 수립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어.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을 넘어 상하이까지 온 홍진은 일본 밀정이라는 불쾌한 의심까지 받아야 했다. 그건 후일 우리 독립운동사의 수수께끼로 남은 황옥과의 관계 때문이야. 언젠가 소개한 대로 황옥은 일본 경찰 간부로 의열단에 잠입했던 일본의 밀정이기도 하고 의열단을 도와서 폭탄을 반입하고 몇몇 독립운동가와 굳게 맺어진 의열단원이기도 했어. 영화 〈밀정〉의 주인공으로 익히 알려졌지(〈시사IN〉 제590호 ‘달리는 경의선에는 항쟁이 흐르고 있었지’ 기사 참조). 평양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며 황옥과 사귄 홍진은 망명 과정에서 황옥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밀정으로 몰렸던 거야.

홍진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거쳐 임시정부 국무령까지 지냈다.

그 의심에서 벗어난 뒤 홍진은 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고 머지않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이 되었어. 이후 그는 각지의 임시정부로부터 힘과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을 쏟았지. 세상에서 파벌 없는 민족은 없고, 적에 대항해 싸우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치열한 파벌 싸움을 치르는 풍경도 세계 역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야. 우리 독립운동 진영도 그랬단다. 이동휘는 곧 상하이 임시정부를 박차고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갔고,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집착해 분열을 자초했으며, 신채호 등은 미국의 조선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두고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라고 극렬히 비판했어. 기호파다 서북파다 지역 갈등까지 있었으니 어지간히 ‘콩가루 집안’이었던 셈이야. 그 콩가루를 뒤집어쓰면서도 어떻게든 같이 해보자고,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어보자고 평생을 호소한 이가 바로 홍진이었어. “아무리 각 개인의 사상 정신이 철저하여도 일심일덕에 복종체를 이룸이 없으면 위대한 사업을 이룰 수 없으니··· 무엇보다 이것으로써 급선무를 삼아야 할 것이다. ···권리는 복종에서 생기는 것이다(〈독립신문〉 1926년 9월3일).” 즉 민족적 단결의 대원칙하에 일단 ‘복종’할 것을, 주의 주장 내세워 서로 치고받지 말 것을 호소한 거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입법부 수반)을 거쳐 임시정부 국무령(행정부 수반)까지 지낸 그는 평생의 지론이었던 민족 유일당 조직을 위해 상하이를 떠나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홍남표 등 공산주의자와도 손을 잡았고, 폭력 투쟁을 모토로 삼는 의열단과도 어깨동무했으며, 만주에 갔을 때는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지. 그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그 사람이면 믿을 수 있다’는 평을 얻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어. 좌우합작이 이뤄져 임시정부 창립 이래 ‘최고의 성황’을 이룬 1942년 10월 제34차 정기의회에서 홍진이 37표 중 33표라는 절대다수를 획득하고 세 번째 임시의정원 의장에 올라선 건 결코 무리가 아니었지. 민족혁명당은 “홍 선생으로 하여금 의장의 직무 대리를 담임하게 한 것은 우리 의회의 행복이요 영광이다”라고 평했어. 이것이 민족혁명당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거야.

우리 역사에서 입법부의 장(長)과 행정부 수반을 모두 지낸 유일무이한 인물 홍진은 쉴 새 없이 갈라지고 반목하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도 했던 우리 내부의 어지러움을 하나의 결로 모아보려던 독립운동가였어. 더하여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로 2018년 2월27일 문화재청이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던 임시의정원 문서 1536장을 들 수 있을 것 같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명기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 원본과 해방 후의 대한민국 재건 계획을 담은 건국강령, 당시 의원 당선증, 광복군 작전보고 등이 포함돼 있다(〈연합뉴스〉 2018년 2월27일)”는 이 문서들은 홍진이 만주와 대륙을 오가면서도 끝끝내 팽개치지 않았던 역사의 기록이야.

평생을 민족의 단결을 호소했던 그가 1946년 해방 직후 70세로 숨을 거둔 것은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구나. 김원봉이나 김두봉 등 상하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거나 홍남표처럼 민족 유일당을 위해 머리를 맞댔던 이들이 북으로 올라가고, 이시영·지청천·김창숙 등 남쪽에 남은 가운데 서로 적이 되어 벌였던 민족상잔의 비극을 보았다면 그 평생이 발밑에서부터 무너지는 심경이었을 테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