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김정륙씨(85)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외아들이다. 반민특위는 1949년 6월 친일파 경찰의 습격을 받고 사실상 해체됐다. 그는 아버지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1935년 중국 난징에서 태어났다. 반민특위 활동이 한창이던 1949년 김정륙씨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그해 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와 마주앉았다. 이 대통령은 ‘살살 다루고 다 풀어줘라. 노덕술을 포함해 경찰을 다 풀어줘라’ 하고 명령하듯 말했다. 이어 ‘몇 달 안 남은 반민특위 시한이 끝나면 내각에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들어와라’ 하고 회유했다. 아버지가 정중히 거절하자 이 대통령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떴다.”

일주일 정도 지난 6월6일, 이승만 대통령이 언급한 ‘후회할 일’의 윤곽이 드러났다. 경찰 80여 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경찰은 무력을 행사했고 사무실에 보관된 친일파 조사 서류를 모조리 강탈해 불태웠다. 반민특위 직원 22명은 부상을 입고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시사IN 조남진팔순이 넘은 김정륙씨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회 특별입법으로 출범한 반민특위에 친일 경찰이 들이닥치자,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즉각 책임자 처벌과 반민특위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국회 요구를 묵살하는 담화를 냈다. 외신기자들에게는 반민특위 습격과 특경대 해산을 자기가 지시한 일이라고 공언했다. “아버지는 피칠갑이 된 반민특위 조사관들과 자료를 강탈당해 텅 빈 사무실 모습을 보고 통곡하셨다. 반민특위 위원 9명을 불러 모아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의견을 모으고 총사퇴하기로 결의했다.”

김상덕 위원장이 사퇴하자, 이승만 정권은 공석이 된 위원장 자리에 법무부 장관 이인을 앉혔다. 사퇴한 위원들 자리는 친일파 청산을 반대한 인사들로 채워졌다. 광복 후 국민 대다수의 염원이었던 ‘친일파 청산을 통한 민족정기 회복’은 1949년 여름 그렇게 멈췄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10대 때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서울 경신학교에 진학한 뒤 은사 김규식 선생(훗날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나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김규식은 1917년 김상덕이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본 유학 시절 김상덕은 조선청년독립단을 만들어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친일파와 이승만 정부의 격렬한 반발

독립운동으로 체포됐다가 1920년 도쿄 형무소에서 풀려난 김상덕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20여 년 동안 독립운동에 청춘을 불살랐다. 1920년대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으로 옮겨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으로 참가했다. 1930년대에는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겨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한데 모으는 사업에 앞장섰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1948년 9월22일 발효된 반민족행위 처벌법으로 체포된 친일파들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1945년 11월23일 그는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부산항으로 환국했다. 귀국한 김상덕은 은사이자 임시정부 부통령이었던 김규식의 중도통합 노선(좌우합작)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김규식이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회의에 참여하자 김상덕도 관선 의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계를 절감하고 김규식과 함께 빠져나온다.

1948년 분단이 고착 상태에 빠질 것을 우려한 김구·김규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상덕을 포함한 일부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과 민족주의 세력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초대 국회에 대거 진출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한민당보다 숫자가 많은 이들은 소장파 의원으로 불리며 제헌국회를 주도했다. 이들이 뭉쳐 가장 역점을 두고 만든 법안이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법)’이었다.

1948년 9월 국회를 통과한 반민법에 따라 같은 해 10월23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김상덕은 제헌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벌 조항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별경찰대(특경대)도 김상덕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군과 경찰에 친일파가 득세해 특경대 조직을 따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검찰·특별재판부·특경대까지 두는 강력한 반민특위가 탄생했다. 광복 후 3년여 동안 미뤄진 친일 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을 학수고대하던 대다수의 염원을 반영했다. 제헌의회는 각 도 국회의원 1명씩 모두 10명으로 반민족 특별위원회를 구성한 뒤 특위 위원장으로 김상덕을 뽑았다.

반민법이 통과되자 친일파들이 반발했다. 반민법을 공포한 다음 날 일제 밀정 이종형이 주최한 대규모 ‘반공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진짜 민족반역자는 반민법을 만든 빨갱이들이니 그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등 반민법을 국회 안의 공산당 소행으로 매도했다. 이날 집회는 사실상 이승만 정부가 총동원령을 내린 반민특위 무산 공세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총리의 축사가 낭독됐다. 윤치영 내무장관, 임영신 상공장관은 직접 대회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일제 말기 ‘조선임전보국단’ 활동 전력이 있는 친일파였다.

1948년 10월에는 친일파 경찰을 중심으로 김상덕 위원장을 포함한 반민특위 간부 암살 음모가 꾸며졌다. 경찰 내 대표적인 친일반민족 행위자인 노덕술은 살인 청부업자 백민태를 고용해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해 반민특위를 적극 추진한 국회의원과 반민특위의 간부 등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 사건은 미수에 그쳤다.

노골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1949년 1월5일 반민특위가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특위 출범 사흘 만에 1호 검거자가 나왔다. 일제하 조선 최고 재벌로 조선비행기회사를 운영했던 박흥식 화신백화점 총수다. 박흥식은 정부의 비호 아래 해외로 빠져나가려다 특경대에 붙잡혔다. 1월10일에는 일제 밀정 출신으로 〈대동신문〉 사장이던 이종형이 검거됐다. 이어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가 붙잡혔다. 김연수는 경성방직 사장으로 만주국 명예총영사 등으로 활동했다. 2월7일에는 친일문학의 거두 최남선과 이광수가 체포됐다. 이광수는 한때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과 도쿄 2·8 독립선언을 함께 주도한 동지였다. “이광수가 체포되던 날 퇴근한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이광수가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랐는데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우겼다고 한다. 이광수를 조사하던 특위 조사관이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 ‘가야마 미쓰로’를 부르자 자동으로 ‘하이!’ 대답이 튀어나왔다고 하더라.”

반민특위가 짧은 기간에 잡아들인 친일파는 688명이었다. 이 중 37%가 친일 경찰이었다. 노덕술을 포함해 친일 경찰을 풀어주라는 이승만 정부의 요구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안보 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담화를 냈다. 그러나 김병로 대법원장은 반민특위 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국회에서도 대통령 담화 철회를 요구했다. 이승만 정부는 특위 활동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개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로 직접 찾아갔다. 1949년 5월 하순 김상덕 위원장의 중학생 아들 김정륙은 관사에서 이승만과 아버지의 담판을 듣게 됐다. “이 대통령이 돌아가자 아버지는 신변의 위험을 직감했다. 관사를 떠나 정릉에 있는 경신학교로 가서 생활하라며 나를 피신시켰다.”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이라는 ‘연좌제’

6월6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뒤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가 되살아날 수 없도록 대못을 박는 조처를 병행했다.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국회의원을 상대로 ‘국회 프락치(간첩) 사건’을 날조했다. 이문원 의원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뒤 이들이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프락치라고 발표했다. 이어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노일환 의원 등 13명을 구속했다. ‘제2차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6월26일에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1949년 9월 사실상 반민특위 폐기를 의미하는 ‘반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와 함께 해체됐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에도 김상덕 위원장은 친일파의 공공연한 표적이었다. 그는 이듬해 치러진 총선 때 고향 경북 고령에서 출마했다. 하지만 친일파의 조직적 테러 위협으로 선거운동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낙선했다. 선거 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김상덕은 북한군에 납치됐다. 노무현 정부 때 김정륙씨는 이산가족 생사 확인 신청을 했다. 북한에서는 김상덕 위원장이 1956년 작고했으며, 재북 인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는 답을 보내왔다.

한국전쟁 초기 아버지가 납북되자 소년 김정륙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닥쳤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아들’이라는 연좌제 망령이 따라다녔다.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 역대 정권에서 아버지는 덮어놓고 빨갱이로 치부됐다.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친 나는 연좌제에 걸려 쉰 살이 되도록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했다. 한번은 간신히 얻은 직장에서 신원조회 끝에 ‘김상덕 아들’이란 사실이 드러나 쫓겨났다.” 김정륙에 대한 감시와 차별은 1990년 아버지 김상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이 수여되고 나서야 풀렸다.

김정륙씨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2대에서 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팔순이 넘은 그는 여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활동으로 보내고 있다.

최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반민특위 망언으로 그를 찾는 기자들의 발길이 늘었다. 나 원내대표는 “정부는 해방 이후 반민특위로 국민이 분열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나 원내대표는 ‘반민특위’가 아니라 ‘반문(재인)특위’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다. 김정륙씨는 이렇게 개탄했다. “나경원 의원의 망언과 변명을 보면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된 춘원 이광수가 연상된다. 친일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궤변을 늘어놓다가 지탄을 받은 이광수처럼 나경원도 망언에 대해 변명만 하다 수렁에 빠졌다. 뼛속까지 친일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무식한 망언을 하겠는가.”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