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열심히 일한 정치 노동자 김지은
  • 황도윤 (자유기고가)
  • 호수 603
  • 승인 2019.04.0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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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이다. 회사가 나에게 ‘똥’을 던질 때마다 이 회사와 일을 사랑할 의미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회사는 내게 늘 서운하다며, 조금만 더 회사를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라고 한다.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부족하다고, 자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성과를 만들어 사랑을 증명하라고 한다. 회사는 항상 내 충성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내가 보답을 원할 땐 언제나 날 버리는 최악의 짝사랑 상대다.

나는 왜 참나? 아니, 우리는 왜 이런 굴욕을 견디는가? 장기 주택자금대출 때문에? 이 회사에서 성공해서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 이깟 일로 그만두면 지는 것 같아서? 모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정말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도 내가 왜 참고 있는지를 가끔은 잘 모르겠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가 왜 성폭력을 당하고도 참았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김지은씨가, 참을 수 없는 회사를 참기로 한 최초의 노동자는 아니라는 점은 안다.

정치권 ‘감정노동’은 주로 여성 몫

ⓒ정켈

이번에는 진짜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한 번만 더 참기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눈물을 닦고 ‘할 수 있다’ 세 번 외친다. 나는 이깟 일쯤은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한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어쨌든 아무 문제 없는 척하는 연기는 성숙한 직장인의 필수 덕목이다. 안희정 측은 김지은씨가 성폭력 이후에도 안희정 전 지사가 좋아할 만한 식당을 찾은 점, 꼭 나올 필요가 없는 주말 일정까지 수행한 점, 살갑게 문자를 주고받은 점을 성폭력이 아니란 증거로 제시한다. 성폭력 피해자라면 당연히 가해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을 거라는 주장이다. 김지은씨는 그냥 일단 회사를 다니기로 했고, 그 ‘개떡’ 같은 일을 참은 만큼 이 일에서 확실한 성취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정치인을 보좌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정치인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감정노동으로 소위 ‘심기 관리’라 불린다. 심기 관리는 격려하는 말하기, 좋아하는 간식 준비하기 등의 낮은 수준에서부터 스트레스 요인을 미리 제거하기 등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조치까지 모두 포함되고, 때로는 타인을 대신해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심기 관리 과정에서 정치 노동자들은 매우 친밀한 감정을 연기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심기 관리라는 감정노동은 정치권에서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여성 노동자에게 주로 요구된다. 여성 노동자의 친밀성 연기는 성애적 맥락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안희정 전 지사는 피해자에게 ‘외롭다’ ‘위로해달라’ 따위의 발언을 하며 성폭력을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아주 가까운 친밀성을 연기하는 감정노동을 요구받았던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요구한 친밀성 연기를 불륜의 증거라고 주장하며 가해 사실을 숨기고, 피해자는 자신의 노동과 범죄 피해를 구분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성폭력 피해를 당하면 피해자가 처한 여러 사회적·개인적 맥락과 무관하게 완전히 무력해진다는 것도 성폭력에 대한 가부장적 환상이다. 피해자가 ‘일단은’ 참기로 했다고 성폭력이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성폭력 전후로 업무적으로 연기한 친밀성은 불륜의 증거가 아니라 김지은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다. 김지은씨는 너무 열심히 일했고, 너무 많이 참았다. 개떡 같은 직장이 피해자의 책임일 수는 없다. 내 노동력으로 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헛된 꿈을 품고 사는 정치 노동자로서 아직 남은 재판을 치러야 할 김지은씨에게 연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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