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운명 개척한 ‘센 언니들’의 투쟁기
  • 김문영 (이숲 편집장)
  • 호수 603
  • 승인 2019.04.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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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발전했고 자유로운 성에 관한 담론이 여기저기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페미니즘은 뜨거운 감자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래서 마땅히 여성의 권익이 보장되고 있다면 ‘여성’이라는 주제가 이토록 뜨거운 토론의 장에 서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미개에서 벗어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여성이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한들, 여전히 수많은 나라, 수많은 자리, 수많은 사회, 수많은 가정에서 제2의 성에 머물러 있는 ‘여성’을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미다.


<걸크러시> 페넬로프 바지외 지음, 정혜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우리말로는 <걸크러시>로 번역된(원제 Culottées·바지 입은, 뻔뻔한) 젊은 프랑스 만화가 페넬로프 바지외의 그래픽노블은 그런 의미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책이다. 책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무작위로 추출된 ‘센 언니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2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여성 30여 명의 각기 다른 삶이 그려진다. 만화는 진지함 속에서도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는다. 작가는 인물마다 짧게는 3~4쪽, 길게는 7~8쪽짜리 만화로 그 여인의 일대기를 함축해 담아냈다. 시대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고, 각기 처한 상황도, 성격도, 직업도 모두 다르다. 책에 실린 여성들의 삶의 큰 줄기는 열정적으로 부조리와 차별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열정적으로 개척해나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풀란 데비의 삶을 보며 울고 또 울고


기원전 4세기 산부인과 의사 아그노디스, 아파치 부족의 전사 로젠, 오늘날 여성용 수영복을 고안한 수영선수 애넷 켈러먼, 노년 여성 생활 공동체를 만든 사회운동가 테레즈 클레르, 무민 시리즈 토베 얀손, 언론인 넬리 블라이 등 그들은 사회의 요구나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규범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다. 책에는 이렇듯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여성들의 삶이 작가 특유의 재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인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겨 흐뭇한 결말을 맺는 이른바 ‘성공한 인생’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여성의 삶은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어서 읽는 내내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특히 ‘도적 왕’이라는 부제가 달린 인도의 풀란 데비의 삶을 엿보면서는 치가 떨릴 정도의 분노가 치밀었다. 작가 역시 작업을 하면서 그녀의 끔찍한 삶이 떠올라 울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10대 어린 나이에 팔려가 수많은 남자의 성적 노리개가 된 그녀의 삶을 쫓아가다가, 문득 그건 비단 과거나 다른 나라에 국한된 일이 아님을 생각했다.

이 책은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의 블로그에 연재된 웹툰을 엮은 것이다. 연재 당시 만화계를 넘어서 대중의 핫이슈로 자리 잡으며 5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작가는 젊고 경쾌한 감각으로 현재 프랑스 젊은 독자층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서울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축제를 통해 한국 독자와도 처음 만났다.

최근 불거진 연예인의 몰카 촬영·유포 사건을 접하면서, 얼마나 많은 남성이 아직도 여전히, 이 땅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여성의 몸을 물질화하는 걸까 싶어 몹시 우울했다. 그들은 웃고 즐기고 비웃고 조롱한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이 근본부터 기울어진 저울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여성이 투쟁하지 않고 평화로운 평등의 장에 설 수 있을까.

왜 이토록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지 궁금한 독자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아직 잘 모르는 젊은 독자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겨워하는 남성들에게, 특히 일상 속에서 폭력을 일삼으면서도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남성에게 (그래도 조금은 깨달음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며)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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