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에 평생 바친 어느 일본인 여성의 삶
  •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 호수 603
  • 승인 2019.04.0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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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 NGO대학원을 졸업한 쓰즈키 스미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평생을 바쳤다. 조선인이었던 그녀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쓰즈키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했다.
일본 히로시마현 동쪽 후쿠야마시에 사는 쓰즈키 스미에(67)는 지난해 8월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석사 논문은 <조선인/일본인 외할머니의 여정-가족사를 통해 바라보는 일본과 코리아>다.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난 쓰즈키의 외할머니(1913~2007)는 1930년대 조선전력주식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던 일본인 남성과 결혼했다. 도쿄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난 외할아버지(1902~1965)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엘리트였다. 당시 조선전력은 저렴한 전력을 확보하고 카바이드와 석탄, 질소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쓰즈키의 외할아버지는 송전선 설치를 위한 토지 매수 일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가족은 외할아버지를 ‘쪽바리’라며 반대했고, 외할아버지의 가족은 외할머니를 ‘조센진’이라며 반대했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의 가족들과 의절했고, 외할머니는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와 일본인 남성과 결혼한 조선 여성에 대한 주위의 경멸을 견뎌야 했다.

1939년께 외할아버지가 중국으로 직장을 옮긴 이후 그의 가족 모두 중국 각지를 옮겨 다녔고 1943년 제천으로 돌아왔다.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인인 외할아버지만 일본으로 강제 송환되어 이산가족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친일파’라며 냉대와 차별을 받다가 1946년 딸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쓰즈키의 어머니(1933~2014)는 외조부모의 조선인 양녀였다. 아버지 국적을 따라 일본인이 되어 일본인 학교에 다니면서 일제의 황민화 교육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불안에 떨며 자랐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일본인 학교에서는 조선인이라고, 동네에서는 일본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진숙’이라는 이름에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표기한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쓰즈키 스미에 제공1990년대 말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을 방문한 쓰즈키 스미에(왼쪽에서 두 번째).

가족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반쪽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유·무형의 차별은 대학생 쓰즈키를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차별과 배제의 대상인 ‘부락민(조선시대 천민과 비슷한 신분) 차별 반대운동’ 등에 관심을 갖게 했다. 1975년 히로시마 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한 쓰즈키 스미에는 후쿠야마시 촉탁 교사가 되어 부락민 아이들을 가르쳤다. 10대의 쓰즈키처럼 부락민의 아이들도 부락민에 대한 차별을 그저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만 여기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차별의 현장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차별 문제는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가르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쓰즈키는 1981년부터 히로시마현 교원이 되어 초·중등학교에서 보건 체육을 가르쳤다. 생명, 성, 피임에서 성폭행까지 다양하고 폭넓게 다루었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의 공개 증언 후, 쓰즈키는 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1994년 서울 혜화동에 있던 ‘나눔의 집’을 방문해 피해자들을 만났다. 1990년대 중반은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온 사람을 접할 기회나 그들에게 증언할 기회가 드문 때였다. 쓰즈키를 대하는 피해자들의 표정은 딱딱했고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 피해자들을 방문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쓰즈키는 피해자들에게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 이야기에 피해자들이 마음을 활짝 열었다. 여태껏 멍에였던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소통의 열쇠가 되었다.

이옥선의 삶 그린 만화 <풀> 일본어로 번역 중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듣고 기록하면서 쓰즈키는 ‘평화 교육과 인권으로 배우는 성교육’의 마지막 수업 주제로 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처음에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실상과 피해를 가르치는 수업만 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서 가해자인 일본 병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쓰즈키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정책에 따라 조선행을 택한 ‘가해자’이자 본인 또한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놀아난 ‘피해자’이기도 한 외할아버지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특공대에 지원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일본 제국 병사들에게 겹쳐놓고 고민하고 궁리했다. 전쟁에 남성과 여성의 성이 각각 어떻게 동원되고 이용되는지 가르치기 시작했고 오늘날의 성폭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함께 연구하는 수업으로 발전시켰다.

쓰즈키는 1997년부터 히로시마 교직원 노조의 동지들, 재일 조선인 피폭자 지원운동을 같이 하던 지인들과 함께 단체를 만들어 다큐멘터리 영화 <나눔의 집 1, 2> <숨결> 상영회를 열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림을 전시했다. 1998년에 동료 교사들과 만든 ‘후쿠야마 왔다 갔다 회(會)’는 2006년까지 한국의 각지를 여섯 차례 방문했다. 평화와 인권을 바탕으로 한·일 역사를 객관적으로 배우고 한국 시민들과 교류하는 활동이었다. 199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해 명예 회복과 손해배상을 요구한 관부재판이 히로시마 고등법원으로 넘겨지자,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재판 지원운동을 시작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일본으로 온 할머니들을 지원하거나 한국의 지원자들과 교류했다. 내가 쓰즈키를 처음 만난 것도 이때다. 당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의 젊은 회원들은 온 정성을 다해 생존자들을 만나러 오고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큰 자극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시민모임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고, 히로시마-대구 시민 간의 연대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 연대운동 속에서 대구시민모임의 사무국장이던 이승훈이 히로시마 교직원 노조의 일원이 되었고, 히로시마현 교직원 노조와 전교조 대구지부는 <한일공통역사교재> 2권을 공동 제작하기에 이른다. 2005년에 <한일역사공통교재 조선통신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서 우호의 조선통신사>가 발간되었고, 2012년 부교재 <한국과 일본 그 사이의 역사>(일본에서는 2013년 발간)가 나왔다. 국가와 민족의 굴레를 넘어 과거사를 직시하고 반성·성찰하자는 뜻에서 만든 교과서였다.

2013년 퇴직한 쓰즈키는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워 2016년 성공회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만나러 가고 ‘단원고 4·16 기억교실’이 주최하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며 한국 사회를 배웠다.

쓰즈키는 지금 김문숙 작가의 장편 만화 <풀>을 일본어로 번역 중이다. 일본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평화 운동가인 이옥선의 삶을 그려낸 <풀>을 통해 부끄럽고 괴로운 역사를 모두 받아안을 수 있기를 바란다. 말년 쓰즈키의 어머니는 딸이 만들어 보낸 송편을 받고 자신의 이름 ‘진숙’을 새긴 감사의 엽서를 보냈다. 쓰즈키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한국인 전쟁 피해자들과 연대의 길을 걷는 쓰즈키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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