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지지 않는 투지의 구하라
  • 랜디 서 (대중음악 평론가)
  • 호수 602
  • 승인 2019.04.0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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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양한모
구하라는 깜찍한 이미지로 데뷔했다. 2008년 존폐 기로에 서 있던 카라의 추가 멤버로 처음 등장한 그는 ‘사과머리’를 한 요정 같은 아이돌로 유명했다. 구하라의 합류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탄 카라는 마침내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에 올랐고, ‘허니(Honey)’ ‘루팡’ ‘미스터’ 등 히트곡도 다수 냈다. 구하라는 특히 예능에서 대활약했다. 운동 신경이 좋아 각종 명절 특집 아이돌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달리기를 잘하기로 유명했고, 날렵하고 끈기가 있어 새로운 운동도 잘 배웠다.

2009년 명절 특집 격투기 예능 <내 주먹이 운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누구도 왜소한 체구인 구하라가 이길 것을 점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반에 몇 대를 얻어맞나 싶더니, 고개를 번쩍 들어 반격에 반격을 거듭해 결국 승자가 되었다. 상대에게서 끝까지 눈을 떼지 않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정 같은 구하라가 만든 반전이었다.

이 장면은 작년 가을 인터넷에 전혀 다른 해석으로 다시금 등장했다. 구하라는 당시 데이트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 보도에 따르면 남자친구였던 최종범씨는 자정이 넘은 시각에 여성 둘만 사는 집에 침입했고, 구하라는 그에 맞서며 최씨의 얼굴에 손톱 상처를 냈다. 이 사건을 남성이 여성을 위협한 데이트 폭력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손톱 상처를 근거 삼아 구하라를 공격했다. 옛날에 격투기 예능에서 펀치를 날리던 모습을 보라며,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서운 여자라고 했다. 구하라는 체격이 현격히 큰 최씨와 대치하는 상황이었건만, 그들은 구하라가 방송에 최선을 다했던 모습을 그녀가 폭력적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통계를 통해 숱한 여성들이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올 초 서울시가 실시한 데이트 폭력 피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인 서울 거주 여성 2000명 중 1770명(88.5%)이 다양한 종류의 데이트 폭력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이런 데이터를 두고도 ‘보통 사람들’은 피해자 탓을 하고 싶어 한다. 피해자가 사실은 무서운 여자일 것이라는 말은 ‘누구누구 동영상’을 찾아 헤맨 수많은 인터넷 이용자의 검색 기록 앞에 의미를 잃는다. 그들은 사실 피해자 여성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여성의 피해를 피해라 부르고 싶지 않아서 무서워하는 척할 뿐이다. 동영상 유포로 여성이 더욱 괴로워할 것을 알면서도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다.

2014년 구하라는 <하라 온앤오프:더 가십>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해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아”라는 말이 상처가 된다고. 자신은 이게 직업이라고 힘주어 말한 그는, 괴로워도 타의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지난해 사건이 일어나기도 훨씬 전에 했던 인터뷰지만 지금의 구하라를 떠올리게 만든다. 구하라가 각종 예능에서 ‘작지만 지지 않는 여자애’의 모습으로서 보여줬던 것은 폭력성이 아니다. ‘투지’다. 주어진 상황 앞에 눈을 똑바로 뜨고 맞서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그는 사적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최종범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협박 및 강요 혐의로 고소했다. 최씨는 오는 4월18일 본인 요청으로 미뤄진 공판 기일을 앞두고 있다. 같은 사건에서 구하라는 상해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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