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장. 그곳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체육계 성폭력 피해자를 만났다. 그녀는 시종 울었다. 수년간 견뎌야 했던 성추행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도움받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외롭고 서러웠다고 했다.

“간판을 크게, 아주 크게 달아주세요.” 체육계 인권 피해자들을 돕는 기관을 만들 때 ‘무엇에 유의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피해자들이 쉽게 알아보고 기댈 언덕이 있다는 것에 힘을 얻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사IN 신선영


대한체육회는 2009년 ‘스포츠人권익센터’를 개설했고 3년 전 스포츠인권센터로 이름을 바꿨다. 그녀도 이 센터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새해 벽두를 뒤흔든 체육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들은 왜 스포츠인권센터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까?

스포츠 인권 보호 정책, 영국에서 배워라

많은 운동선수는 스포츠인권센터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신고를 해본들 대부분의 사건은 시도 체육회로 내려보내지고, 전문성이 전혀 없는 사무직원이 조사를 한다고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자리에 앉혀놓고 조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미리 귀띔해주는 바람에 그들에게 협박을 당하거나 2차 가해를 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고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선수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1993년 영국에서는 폴 힉슨이라는 전 올림픽 대표 수영 코치가 10여 년간 여자 청소년 선수 13명을 성폭력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유사한 범죄가 속출하면서 사회 전체가 도덕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영국은 국가 차원에서 스포츠 인권을 보호하고 예방하는 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영국 체육회와 아동보호 전문단체가 팔을 걷어붙였다. 정책과 행동계획을 수립했고, 이를 실행할 전담조직(CPSU)을 만들었다. CPSU는 위기 상황의 선수나 학부모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상담 등 지원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인권교육과 홍보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했다. 특히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과 기준을 만들었는데, 영국 체육회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단체들에게 이 기준 이행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결과는? 10년 전 한국의 체육 및 인권전문가들이 영국을 찾았을 때, 이 운동을 이끌었던 영국 브루넬 대학의 실리아 브래켄리지 교수는 한마디로 “획기적인 정책 개선 효과를 낳았다”라고 자평했다.

10년 전 대한체육회의 스포츠人권익센터가 만들어질 때도 상황은 유사했다. 한 방송사의 체육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충격적 심층보도에 시민사회가 들끓자 대한체육회는 자정 노력의 일환으로 부랴부랴 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10년 후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영국과는 판이하다.

 

 

 

 

ⓒ연합뉴스1월10일 열린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 촉구’ 기자회견 모습.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10여 년 전부터 성폭력을 비롯한 스포츠 분야의 인권침해 문제에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IOC는 2007년 ‘스포츠 분야의 성폭력 예방정책 가이드라인 합의문’을 발표했고, 유엔아동기금(UNICEF) 또한 이듬해 ‘스포츠에서 아동보호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문을 두드리고 그곳에서 인권유린의 피해를 상담하고 치유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스포츠인권센터의 건립은 즉각적으로 이행돼야 할 시대적 과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선진국처럼 장기적인 국가 스포츠 인권정책이 체계적으로 수립되고 이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한국이 명실공히 스포츠 선진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 사건이 터지면 부랴부랴 내놓은 땜질식 응급처방의 한계는 이미 다 드러났다. 물론 국민을 설득하기도 어렵다.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관계자들이 명심할 일이다.

기자명 문경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조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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