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슴푸레한 새벽녘, 전화벨 소리에 깬다. 발신지가 스웨덴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남편이 말한다. “다른 전화기로 제 아내가 함께 들어도 될까요.” 얼른 서재로 건너가 수화기를 드는 아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어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남편 조셉 캐슬먼(조너선 프라이스)은 침대 위에 올라가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고 있다. “내가 노벨상을 탄다네~. 내가 노벨상을 탄다네~.”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는 남편의 손을 잡고 함께 뛰던 아내 조안(글렌 클로스)이 갑자기 멈춘다. 잠시 남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없이 침대에서 내려온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조의 여왕’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순간이 가슴 벅차서 그럴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장면의 진짜 의미를. 침대에서 내려온 아내를 따라 영화의 남은 여정을 90분 동안 완주한 뒤 곱씹으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두 사람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영화의 어떤 순간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고 난 다음이기 때문이다. 첫 소설 판권을 출판사가 사들인 날, 그때도 남편은 침대 위에 올라가 아내 손을 잡고 방방 뛰며 노래를 불렀다. “우리 책이 나온다네~. 우리 책이 나온다네~.”
글렌 클로스의 연기에 소름이 ‘쫘악~’
나이 들어서도 여전한, 남편의 귀여운 버릇처럼만 보이는 두 장면은 사실 이렇게 다르다. 젊은 시절의 그는 ‘우리 책이 나온다’고 기뻐했고, 노년의 그는 ‘내가 노벨상을 탄다’며 좋아했다. ‘우리’가 ‘내’가 되었다. ‘we’에서 ‘I’로 주어가 바뀌었다. 아마 남편은 몰랐을 것이다. 아내만 눈치 챘을 것이다. 남편 눈에는 끝까지 사소해 보이겠지만, 아내에게는 처음부터 사소하지 않았던 단어 하나 차이가, 이 부부에게 찾아온 거대한 균열의 시작일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도 퍽 좋았지만, 두 번 보면서 더 좋아하게 된 이유다. 매 순간, 모든 단서가 아내의 표정에 이미 다 드러나 있었다. 부부의 모든 비밀을 알고 난 뒤 다시 보는 배우의 예리한 연기에 몇 번이나 소름이 돋은 까닭이다.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글렌 클로스는, 두고두고 기억될 수상소감을 남겼다. 이 영화의 라스트신 뒤에 에필로그로 이어져도 어색하지 않을, 어느 ‘아내’의 그 고백을 여기 옮겨본다.
“제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평생 헌신하셨는데, 여든이 넘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얘야, 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구나.’ 이런 경험들을 통해 제가 배운 건, 우리 여성이 언제나 ‘양육자’ 역할을 요구받는다는 거예요. 늘 아이가 있거나 남편이 있죠. 그건 옳지 못해요. 이제는 우리 자신의 성취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을 좇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있어. 당연히 해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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