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태극기는 늘 높은 곳에 있었다. 학교 국기 게양대 꼭대기에서 바람을 받아 펄럭였고, 교실 안에서는 급훈과 교훈 사이 좀 더 높은 곳에 걸려 늘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기 하강식은 일종의 족쇄였다. 길을 가다가도 국기 하강식을 한다는 장엄하고도 무미건조한 음악이 울리면 길가에 ‘국기에 대한 맹세’ 낭독이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그래서 태극기에 대한 기억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저 멀리 높은 곳에 걸려 있으며 늘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속하는 기호이자 상징물이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싶은 기분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태극기의 역사와 어떻게 달아야 하는지를 배우고 시험 쳐도 태극기는 늘 저 높은 곳에서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일 뿐, 내 국기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저 높은 곳의 태극기가 낮은 곳으로 내려와 내 것처럼 느껴진 순간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하느라 옷을 만들어 입고, 모자처럼 쓰고, 축구장에서 거대하게 펼치고,
다 갖은 방법으로 태극기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 순간은 태극기가 이럴 수도 있구나, 내 몸에 내려와 닿고 감길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겼다. 그 뒤 태극기는 높은 곳에 걸려 있지만은 않은, 친해질 수 있는 상징이었다. 적어도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만은.
태극기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태극기 부대’ 때문이었다. 태극기가 싫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 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지겠지 싶었던 태극기 부대가 지속적으로 극성을 부리더니 드디어 현실 정치에서 힘을 발휘했다. 적어도 길거리에서 만나는 태극기는 의심과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아래로 내려온 태극기가 저 높은 곳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더 고약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의심과 기피의 대상이 되어버린 태극기
태극기 부대에게 태극기란 무엇일까? 2년 전쯤 서울시청 앞에서 태극기 부대 시위에 나선 한 여성을 찍었다(사진). 기꺼이 사진을 찍겠다고 응해준 고마운 이다. 그런데 이 여성에게 태극기란 무엇일까?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사진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손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맨 깃대를 들고 있었다. 머리에는 태극기가 그려진 왕관을 쓰고, 눈에는 태극기 무늬의 안경 비슷한 것을 썼다. 검정 마스크에는 ‘헌법 84조(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X’라고 쓰여 있다. 물론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태극기는 장식이자 방패이고, 정치적 의사 표현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성이 들고 쓰고 끼고 있는 태극기는 박근혜 탄핵에 대한 불만이 기호화되었다고 읽어도 별 무리 없어 보인다. 처음 만들었을 때와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태극기란 무엇일까? 자랑스러움과 기쁨, 증오와 기피의 감정 사이에 있는 태극기는 물론 아무 죄가 없다. 늘 인간이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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