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새삼 한 가지 사실을 절감했다. 아직도 우리 운명은 우리 손아귀에서 멀다는 점이다. 두 정상이 우리 삶을 좌우할 중대한 논의를 하는데도 우리는 바깥에서 빙빙 돌아야만 했다. 회담이 결렬로 치닫는데도 한국 기자들은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날리는 트윗에만 목을 맸다.

백악관 출입기자의 표현대로 회담은 ‘초현실적으로’ 마무리됐지만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잘난 척하며 장황하게 떠든 얘기를 들은 게 고작이다. 그 가운데는 차마 들어주기 거북한 대목도 있었다. 그는 한·미 군사훈련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니 한국은 돈을 더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미국이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말도 세 번이나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보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가도 아닌 한반도를 분단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소련발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고, 구체적으로는 일본을 지키려고 한국 사정에 무지한 대령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다 그은 것이 38선이다. 애초에 미군은 한국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이데올로기, 군사적·경제적 패권을 지키려고 주둔한 것이다.

ⓒ한성원

동족상잔과 분단의 장기화로 50년 넘게 고통받아온 처지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만 한다는 게 분하다. 그동안 한국이 배를 곯고 복지를 포기하면서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미제 무기를 사들였는지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미국 대통령을 향해 북한에 더 강한 압박을 가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 한국 기자(채널A)는 또 뭔가. 미국이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겨왔다는 걸 깨닫는다.

어려서 나라와 수도 이름 맞히기를 즐겨 했는데 나라와 수도 이름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를 많이 외워두면 유리했다. 그래서 알게 된 나라가 엘살바도르다. 이 나라의 수도는 산살바도르. 이 나라는 요즘 또 다른 이유로 유명하다. 누군가 내게 미국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말해주는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대답하겠다. 그렇다. 바로 이 나라, 엘살바도르다. 스페인어로 살바도르는 구세주다.

이 나라에 구세주는 어디에도 없다. 대신 나라 전체에 갱들이 바글댄다. 전국의 갱단 조직원이 6만명에 달한다. 독재와 부자의 경제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게릴라가 아니라 순수한 깡패, 건달, 강도, 도둑이다. 갱의 가족과 일가친지, 정보원, 전직 조직원, 그리고 갱 은어로 칼마도스라고 불리는 갱에 순응한 사람 등 50만명 정도가 그들의 사회적 기반이다. 640만 인구의 8%에 육박한다.

갱은 전체 262개 지자체 중 247개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로를 가로막고 자신들의 법을 집행하기도 한다. 마약과 무기 거래도 하지만 주 수입원은 시민에게 뜯는 보호비다. 적게는 5달러, 많게는 50달러까지 갱이 장악한 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은 매달 세금처럼 돈을 낸다. 이렇게 모은 갱의 연간 수입이 3120만 달러에 달한다.

미국, 중앙아메리카 출신 갱들 본국으로 ‘수출’

갱단 간의 전쟁, 갱단 내부의 권력 다툼, 그리고 일반인을 향한 보복 테러로 2017년 이 나라의 살인율은 인구 10만명당 61명으로 세계 1위였다. 2015년 105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줄어든 게 이 정도다. 전쟁을 치르는 나라까지 통틀어 시리아,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위험한 나라다.

도대체 그 많은 갱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가장 큰 갱단은 마라 살바트루차, 약자로 MS13이라 불린다. 마라는 갱, 살바트루차는 불개미란 뜻이다. 이에 맞서 피의 세력 다툼을 벌이는 범죄 집단이 18번가(18th Street)의 두 분파다. MS13이나 18번가 모두 원산지는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1700㎞ 이상 떨어진 미국이다.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 좌익 게릴라가 하층민이 사는 농촌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군부 세력과 백인 엘리트가 토지와 부를 독점해 하층민 사이에 누적된 불만이 터진 것이다. 뒤뜰에서 공산주의자가 득세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미국은 우익에 수십억 달러의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부패한 정부군이 민심을 업은 좌익 게릴라(FMLN)들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전쟁은 장기화했다. 1992년 정부군과 게릴라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 12년 동안 7만5000명이 사망하고, 100만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수만명이 미국으로 피신했다. 미국으로 도피한 이들은 그곳에서 생업을 꾸리고 공동체를 형성한 뒤 고국으로 송금했다.

그들이 함께 데리고 온 아이들은 남의 나라 땅에서 정체성을 갖기를 열망했다. 미국의 백인과 흑인, 그리고 다른 히스패닉 이민자의 차별과 공격을 가려줄 방패가 필요했다. 그렇게 자위(自衛)와 소속감을 원해 엘살바도르 젊은이들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든 단체가 MS13이다. 그러자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피코유니언 시 18번가에서 히스패닉 이민자를 흡수해온 갱단 ‘18번가’도 다른 엘살바도르인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마약 거래가 급격히 늘어나자 갱단 간의 다툼은 단순한 주먹다짐에서 무자비한 총질로 변했다.

갱단 간, 그리고 갱단 내부의 다툼이 걷잡을 수 없이 잔인해지자 미국은 범죄에 가담한 중앙아메리카인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1998~2014년 사이 엘살바도르를 비롯한 출신 국가로 ‘수출’된 중앙아메리카인은 30만명에 달한다. 미국은 자국의 반공 지상주의 정책, 차별과 치안 부재가 낳은 쓰레기를 중앙아메리카에 마구 내다버린 셈이다. 갱은 미국보다 사회안전망이 훨씬 허술한 고향에서 미국에 있을 때보다 악랄하게 진화해 국가권력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00만명이 바글대는 수도 산살바도르의 슬럼가에서는 로스앤젤레스보다도 훨씬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진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더욱 꼬였다. 지난해 1월 트럼프 대통령은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TPS(Temporary Protected Status·임시보호 신분) 적용 중단을 선언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인은 26만여 명. 내전 기간과 2001년 대지진 때 피난한 사람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뜻이 관철되면 그들의 TPS는 올해 9월 만료된다. 이들이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태어난 어린아이 19만명은 부모와 생이별하게 생겼다. 트럼프 행정부는 임시보호 신분 법적 요건인 자연재해나 전시 상황이 종료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고향은 지금 전쟁터나 다름없다. 갱들은 누 떼가 강을 건너기만을 기다리는 악어와 비슷하다. 미국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살아 현지인보다는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가 있는 이들을 엘살바도르로 돌려보낸다면 맛있는 먹이를 갱단에게 던져주는 것과 다름없다. 이들은 산살바도르의 이민센터를 나서는 순간 몸값을 노린 갱의 인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동안 경제원조를 제공해온 베네수엘라의 좌익 정권이 흔들리면서 더욱 곤경에 처했다. 갱이 극성인 곳에는 군까지 투입하지만 효과가 없다. 경찰과 군은 갱 못지않게 포악하지만 제 한 몸 지키기에도 벅차다. 수입이 형편없는 경찰과 군의 가족은 변두리에 살 수밖에 없어 갱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엘살바도르인 가운데는 경찰이나 군이 자기들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 이들이 많다.

여성과 아이들이 가장 큰 희생자다. 미국이 갱을 수출한 뒤 아이들의 출석일수가 크게 줄었다. 전체 학교의 65%가 갱의 위협 아래 있다. 아이들은 폭력의 희생자이자 미래의 가담자다. 2017년 여성 468명이 살해되었다. 19시간마다 한 명꼴로 죽임을 당한다. 셀 수 없는 이들이 행방불명되었다. 강간당한 여성들은 6명 중 1명만 신고한다. 경찰의 배신, 갱의 보복이 두려워서다. 누구보다도 여성이 엘살바도르를 떠나고 싶어 한다.

갱은 중앙아메리카 북 3국이라 불리는 엘살바도르·과테말라· 온두라스 전역으로 퍼졌다. 미국이 묻지 마 우익 독재를 지원하는 바람에 내전에 시달리다 국력이 피폐한 나라들이다. 갱은 국가로부터 영토를 뺏은 것이 아니라 권력이 공백 상태인 곳으로 진입한 것뿐이다.

온두라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국토 곳곳에 섬과 같은 안전지대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외국 자본은 마음껏 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온두라스 정부는 부자 피신처를 만들려 한다고 야당과 시민단체로부터 비난받으면서도 국토의 8%를 안전지대로 만들고 국민 38만명을 이곳으로 옮기려 한다. 공권력이 마비된 중앙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로 이런 방식이 퍼진다면 이 지역에는 과거 식민지 시대처럼 조차지가 속속 생겨날지도 모른다.

중앙아메리카가 아수라장이 된 데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의 안전만 도모하기에 바쁘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정부가 보였던 일말의 죄책감마저 버린 듯한 모습이다. 엘살바도르인을 강도라 부르면서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의 역사와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다. 베네수엘라의 파탄까지 겹쳐 중앙아메리카는 중동과 아프리카 못지않은 혼돈에 빠져들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보노라면 이번 기회에 남북 평화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우리 운명의 지배권도 미국에게서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참고한 활자:싱크탱크 크라이시스 그룹 보고서 〈라틴아메리카와 캐리비언〉, 〈내셔널 지오그래픽〉,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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