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책’ 하면 왠지 ‘무겁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뭔가 인생에 대한 철학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아포리즘 몇 개 정도는 있어야 비로소 책이라 불릴 만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한데 꽤 예전부터 발간되는 책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 아래 짧고 간결한 내용을 담은 책들이 더욱 잘 팔리는 게 대표적인 현상이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무겁고 전문적인 지식에 기대지 않았음에도 인상적인 내용을 담은 음악 책들을 자주 봤다. 지금 소개할 책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이 바로 그런 경우다.

〈청소하면서 듣는 음악〉이라, 아마 1980년대나 1990년대였다면 기획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취향의 세분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그 취향에 기반한 독립 서점이 곳곳에 생겨난 현상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에세이가 잘 팔리는 출판 시장에서 이렇듯 가벼운 터치로 써낸 책이 만들어진 건 어쩌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내용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저자의 깊은 음악 듣기에 감탄할 구석이 여럿이다.

책을 지배하는 자세는 여러분도 잘 아는 바로 그것, ‘덕후심’이다. 저자 이재민씨는 꽤 헤비한 음악 팬임이 분명하다. 그는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재즈가 대부분이지만 팝, 일본 음악, 메탈, 한국 인디 등등. 그가 다채로운 음악 덕질을 해왔음을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다. 덕후란 무엇인가. 덕후란 자기 취향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사람을 뜻한다. 동시에 필수적인 정보는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한다. “듣고 좋으면 장땡이지”라는 사람들이 혹여 TMI(Too Much Information·너무 과한 정보)라 지적해도 그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 그리하여 디테일과 TMI가 우리를 구원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이게 바로 덕후심의 에센스 아닐까 싶은 거다. 솔직히 무슨 말만 했다 하면 TMI라고 단정 짓는 요즘 세태에 약간 불만이긴 하다.

ⓒ이재민 Instagram 갈무리그래픽 디자이너 이재민씨.
몇몇을 제외하면 책에서 소개하는 뮤지션·밴드들은 친숙함과 좀 거리가 멀다. 컬렉터 정신으로 음악을 찾아다녀본 독자가 아니라면 “누구지?” 싶은 순간이 꽤 있을 것이다. 이거부터가 일단 TMI처럼 비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걱정 마시라. 이 지점에서 책의 진가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재민씨는 글로 음악을 듣고 싶어지게 하는 데 가히 선수급이다. 나부터 그랬다. 뮤지션 이름은 알아도 챙기지 못한 음반이 몇 있었는데 CD 구입과 스트리밍으로 싹 다 감상해버렸다. 과연 도처에 스승이 있음을 다시금 절감했다.

누군가를 통해 접하게 된 책과 음악들

책을 추천받은 건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였다. 한 매체와 미팅하면서 음악과 책 얘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혹시 이 책 보셨어요?” 하면서 슬쩍 내민 것이다. 제목에 혹한 나는 곧장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구매 버튼을 눌렀다. 왜 이리 성급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변호하겠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눠보니 그의 취향을 믿어도 괜찮겠구나 판단이 섰다.

이런 사람들로 주위를 하나둘 채워야 한다고 믿는다. 나만 해도 누군가를 통해 접하게 된 인생 책이나 인생 음악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오직 자기만 신뢰해서는 결코 좋은 취향을 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창문은 있지만 정작 출입문은 없는 좁은 방 비슷한 거다. 정확한 수치로 계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내 주변 지인들을 쭉 한번 떠올려본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인생이구나 싶은 밤이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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