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목소리, 이주여성의 ‘미투’
  • 대구·김영화 기자
  • 호수 599
  • 승인 2019.03.1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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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인 처제를 강간·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한국인이 1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시민단체들은 체류 불안에 떠는 이주여성의 현실을 간과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한국에 이렇게 오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캄보디아인 깐냐 씨(가명·23)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건 2014년 6월이었다. 1년마다 체류 기간을 연장해야 하는 방문동거 비자(F-1)는 2017년 이후 더 연장되지 않았다. 2017년 5월부터 형사소송이 진행되면서 그의 체류가 임시 연장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17일이 되어서야 1심 판결이 났다.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이봉수)는 처제인 깐냐 씨를 강간·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 아무개씨(52)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녀의 체류 기간이 예상과 달리 더 길어지게 됐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 김씨의 범죄가 증명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형부인 김씨 측은 처제인 깐냐 씨를 폭행·협박한 적이 없고 합의에 따른 성관계였다고 주장했다. 성범죄 특성상 직접 증거로는 피해자 깐냐 씨의 진술이 유일했다. 1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관한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그대로 신빙하기가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깐냐 씨가 처음 성폭력이 발생한 시기와 경위, 횟수 등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깐냐 씨 법률대리인은 “범행이 거의 매일 발생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시기와 횟수를 특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북지방경찰청 보안과의 한 관계자는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됐다고 말했다.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제공2월13일 시민단체들이 이주여성 성폭력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를 규탄했다.


형부 김 아무개씨는 경찰 조사 때까지만 해도 성관계 자체를 부인했다. 구속영장 실질심사 때 그는 “피해자와 서로 좋아서 한 일이다”라고 말을 바꿨다. 김씨는 1심 재판에서도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합의에 의한 행동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 “처제를 폭행하거나 협박한 사실 또한 없으며 깐냐 씨가 자신의 말을 협박으로 이해했다면 한국어가 서툰 탓이다”라고 말했다.

이주여성을 오랫동안 상담해온 시민단체들은 이 판결에 반발했다. 2월13일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족 성폭력의 특성과 이주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등 212개나 되는 시민사회단체가 지지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5년 전 깐냐 씨가 한국에 온 건 언니가 보낸 ‘긴급 요청’ 때문이었다. 언니 미토나 씨(가명·32)는 2011년 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김씨와 결혼했다. 당시 한 살 터울로 자녀를 출산한 언니가 육아로 힘겨움을 여러 차례 토로했다. 동생은 조카를 돌보고 가사를 돕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형부 김씨의 초청으로 방문동거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

3년간 언니·형부와 한집에 살며 깐냐 씨가 마주한 건 김씨의 폭력 성향이었다. 언니 미토나 씨는 남편의 난폭한 행동으로 수차례 관련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112에 김씨의 난폭한 행동을 신고해 집 근처 지구대가 여러 차례 출동한 적도 있다. 결국 남편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이주여성 쉼터를 4차례나 이용했다.

애초에 깐냐 씨의 캄보디아 귀국이 계속 연기된 건 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다. 언니는 우울 증세가 심해지며 입·퇴원을 반복했다. 깐냐 씨에 따르면 형부 김씨의 성폭력이 시작된 건 미토나 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2016년 10월부터였다. 깐냐 씨는 “아픈 언니와 어린 조카들을 걱정하는 나를 형부가 협박했다”라고 주장했다. 대구이주여성쉼터 고명숙 소장은 “가정폭력으로 언니가 병원 치료까지 받는 상황을 지켜본 깐냐 씨는 형부 김씨를 무서워했다”라고 말했다. 깐냐 씨는 “형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언니를 병원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언니를 못 만나게 캄보디아로 보내버릴 거라고 했다”라며 협박 내용을 진술했다.



체류 기간 연장에 가해 혐의자 보증 필요


깐냐 씨에 따르면, 그때부터 김씨는 이후 6개월간 수차례 성폭행을 했다. 깐냐 씨는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못했다. 형부의 성폭행이라, 가족에게 알리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강혜숙 대표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나 하나만 입을 다물면 가정이 유지된다’는 생각으로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6개월 동안 피해가 지속되었지만 깐냐 씨가 적극 저항한 증거가 없다”라고 판시했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설과 판례를 종합해보면,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 또는 협박이 있을 때 강간으로 본다. 이른바 ‘최협의의 폭행·협박설(최협의설)’이라고 부르는데, 그동안 이 최협의설은 법원이 ‘진정한 피해자’상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면 법원은 피해자가 술을 마시고 여관에 따라 들어갔거나 많은 사람이 있는 기숙사에서 구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강간이 아니라고 봤다(<시사IN> 제548호, ‘성폭력 피해자 울리는 멀고 높은 법’ 기사 참조). 이번 재판부도 “피고인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폭행·협박)이 없었다”라는 점을 들어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는 이주여성의 체류 현실을 간과한 판단이라고 여성단체들은 비판한다.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강혜숙 대표는 “물리적인 폭력만이 피해자를 위협하는 게 아니다. 이주민에게 ‘체류권’ 허용 권한을 가진 내국인은 그 자체로 위력적이다. 체류권은 이주여성을 통제하는 핵심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깐냐 씨가 받은 체류권(방문동거 비자)의 체류 기간 연장에는 형부 김씨의 신원보증이 필수다. 초청했던 김씨의 신원보증 없이는 1년 단위의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없었다.

깐냐 씨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실제로 이주여성이 겪는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는 상당하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결혼이주민 실태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조사 대상자 920명 중 387명(42.1%)이 가정폭력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다. 그중 폭력 위협(38.0%), 성행위 강요(27.9%) 등을 겪었다는 응답도 높다(위 표 참조). 그럼에도 신고는 쉽지 않았다. 피해를 당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140명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몰라서(14.6%), 체류 자격이 불안정해질까 두려워서(9.8%)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주여성의 ‘미투’를 어렵게 하는 근간이 체류 불안이라는 뜻이다.

1심 판결 뒤 검찰은 항소했다. 깐냐 씨를 가까이서 지켜본 대구이주여성쉼터 고명숙 소장은 1심 판결 뒤 깐냐 씨가 했다는 말을 전했다. “고소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깐냐 씨는 현재 언니와 조카들을 걱정하고 있다. 언니 미토나 씨는 형부 김씨와 함께 살고 있다. 미토나 씨 역시 결혼한 지 8년이 지났지만,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다. 남편의 동의와 협조가 있어야만 체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삶이다. 고명숙 소장은 “동생 깐냐 씨나 언니 미토나 씨처럼 폭력에 노출된 이주민들이 한국에서 법적 구제를 받으려면 강제 추방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여성이 어떻게 ‘미투’를 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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