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한국 사회를 뒤흔든 여섯 글자. 2월1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법정 구속시킨 2심 판결문에 등장한다. 판결문은 나오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는데, 특히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이 그랬다. 물증 없이도 ‘감수성’으로 유죄가 나왔다며 분노하는 여론도 있었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킹인지 갓수성’이라는 표현도 유행했다. 증거가 없는데도 성인지 감수성만 가져다 붙이면 무조건 유죄가 나온다는 조롱이다. 이른바 ‘곰탕집 성추행 사건’(피해자 여성의 진술을 받아들여 성추행 유죄가 나온 사건) 등이 남초 커뮤니티의 공분을 산 역사가 있었는데,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어떤 의미로, 이 여섯 글자는 과하게 주목받았다. 성인지 감수성은 2심 재판부 판단의 핵심 논거라고 보기 어렵고, 적극적·급진적인 해석을 도입한 것도 아니며,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면서 딱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이 여섯 글자는, 그 야단법석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방식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헌법 원리들 간의 충돌, 한 세대를 넘는 오랜 싸움, 그 결과로 매우 천천히 이루어진 권력이동의 역사가 이 여섯 글자에 응축되어 있다. 이것은 헌법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즉,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계약에 대한 이야기다.

 

ⓒ연합뉴스2018년 10월27일 서울 대학로에서 시민들이 ‘성범죄 유죄추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던 안 전 지사는 2월1일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심과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피해자의 증언을 인정하느냐 배척하느냐에서 갈렸는데, 1심 재판부가 배척한 피해자 증언을 2심 재판부는 거의 그대로 인정한다. 이로써 결과가 뒤집힌다. 2심 재판부는 지난해 4월에 나온 대법원 판례(2017두74702)를 인용한다. “법원이 성폭행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피해자 진술은 원래 증거의 한 종류”

첫눈에 이 판례는 마치 성폭력 사건에서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해자의 이익으로”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읽힌다. 형사법의 대원칙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를 뒤집은 것 같다. 그래서 남초 커뮤니티 여론은 ‘성인지 감수성’ 판례가 ‘유죄추정 원칙’이라고 비난한다. 성관계는 특성상 물증도 증인도 남기지 않는다. 상대가 동의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건 매우 어렵다. 그러니 서로 동의해 성관계를 맺은 사이에서 여성이 마음을 바꿔 남성이 협박을 했다며 강간으로 고소하면, 남성은 동의서라도 써두지 않는 한 꼼짝 없이 당한다. 자신을 보호할 무기가 하나도 없으니, 이쯤 되면 근대 형법이 아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판례가 있다. 성관계의 특성은 성폭행 사건의 특성이기도 하다. 증인도 물증도 없다는 것.” 류영재 판사(춘천지방법원)는 정확히 포인트를 잡아놓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기자에게 말했다. “널리 퍼진 오해와 달리, 형사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은 원래 증거의 한 종류이자 가장 직접적 증거다. 다만 그 증거의 신빙성을 여러 정황에 비추어 인정하느냐 배척하느냐를 판사가 판단한다. 성폭력 사건은 제3자 증인이 있기 어렵고 대체로 물증도 없기 때문에 피해자 진술 증거의 신빙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피해자 진술과 기타 정황을 고려하여 증거의 증명력이 있다는 판단이 서면 유죄를 선고하고 그 반대라면 배척한다. 증거에 따라 판결하므로 유죄추정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은 성폭력 사건에서 특히 중요한 쟁점이다. 2013년 서울고등법원 김상준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박사학위 논문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를 썼다. 그는 1심 유죄가 항소심(2심) 무죄로 뒤집힌 강력범죄 사건 540건을 분석했다. 이 중 피해자 진술 신빙성이 쟁점인 사건 수는 266건이었다. 그런데 이 266건 중 240건이 성폭력 범죄다. 90.2%에 달한다.

피해자 진술이 증거라고는 해도, 피해자의 오판이나 변심, 악의적 무고 가능성을 배제하기가 간단치 않다. 다른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해소하고 판사가 유죄심증에 도달하려면 더 단단한 증거가 필요해 보인다. 판사에게 가장 안전한 해결책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폭행하거나 협박한 증거가 명백하고 심각할 때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에도 부합하는 것 같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 범죄가 성립하는 조건으로 정한다. 법원은 폭행과 협박도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했다.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로 명백한 폭행·협박이 있을 때 강간죄를 인정했다. 이런 좁은 해석을 ‘최협의설’이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다수설이다. 폭행·협박이 명백·심각한 강간은 처벌한다. 그 외에는 강간으로 보지 않는다. 깔끔한 흑백의 세계다(아래 그림).

 


1990년대 이전까지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정조’였다. 여성의 정절을 지키는 게 강간죄를 만든 목적이었다는 얘기다. ‘보호법익 정조’와 ‘최협의설’의 조합은 지금 관점으로 보면 거의 초현실적인 논리로 이어진다. 정조를 보호받을 자격이 있으려면, 우선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숙한 여성이어야 한다. 정숙한 여성은 안전보다도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오직 항거 불능일 정도로 심각한 폭행·협박으로만 정숙한 여성이 정조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피해자’에 대한 통념이 만들어진다. ‘진정한 피해자’란 목숨을 잃기 직전까지 저항하고, 강간에 결코 협조하지 않고(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정숙한 여성은 강간이 불가능하다), 가해자를 철저하게 피해 다니며, 정조를 잃었으니 일상이 무너질 것이다. 강간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러할 것이라는 식의 선입견을 법조계에서는 ‘강간 통념’이라고 부른다. 40대 자영업자 이 아무개씨는 2013년 10월 자신의 회사 20대 여직원을 차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피해자가 스키니진을 입어서 강제로 벗기기 어렵다는 점을 판단 근거 중 하나로 들었다. 이 사건은 2심에서 유죄로 뒤집혔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은 “피해자의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집중적으로 편다. 안희정 전 지사 재판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은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사건 이후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이모티콘이나 애교 섞인 표현으로 친근감을 표시하는 등 성범죄 피해자라면 도저히 보일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2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간 통념과 최협의설이 만나 만들어내는 깔끔한 흑백의 세계, 명백한 강간만 강간이고 나머지는 아니라는 세계는 법원에게는 매우 안전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실제 현실과 달랐다. 현실은 ‘명백한 동의’와 ‘명백한 강간’, 그리고 그 사이의 아주 넓은 회색지대로 이루어진다(15쪽 아래 그림). 항거 불능까지는 아니지만 중대한 위협을 느껴 응하는 성관계, 원하지 않지만 불이익이 두려워 응하는 성관계, 원하지 않지만 남성에게 미안함이나 죄의식을 느껴 응하는 성관계 등등. 이 회색지대는 명백한 흑백지대보다 훨씬 넓고, 단계 구분이 불가능할 만큼 연속선상으로 이어져 있다.

권력은 현실의 회색지대를 무시하고 안락한 흑백의 세계를 고집할 수 있는 힘이다. 회색지대를 다룬다는 것은 법원이 안락한 흑백의 세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법원이 그러도록 만드는 어떤 힘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고전적인 의미의 권력이동이다. 첫 번째 장면은 1990년대에 나왔다. 이 시기에 강간죄 등 성폭력범죄의 보호법익이 ‘부녀의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바뀐다(18~19쪽 기사 참조). 여성을 ‘남성을 위한 정절의 보관자’가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 겨우 출발선에 세운 시점이 이때다.

더 의미심장한 권력이동은 2005년에 등장했다. 이 해에 대법원은 한 성폭력 사건을 다룬다. 피고인은 자신이 운영하는 노래방에 속칭 ‘노래방 도우미’ 여성을 불러 힘으로 제압하고 강간했다. 1·2심 재판부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는데, 피고인이 방 밖으로 나갔을 때도 피해자가 방에 머물러 있었고, 때리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고,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으며, 피해자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였다. 대법원은 이를 파기한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사후적으로 보아 성교 이전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섣불리 (강간이 아니라고)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쓴다(2005도3071).

김영란 대법관이 택한 두 번째 전략

이것은 법원이 안락한 흑백의 세계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라는 표현은 현실의 회색지대에 발을 들이고 그 불확실성을 성실히 감당하라는 요구였다.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라는 표현은 판사들이 ‘진정한 피해자’ 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강간 통념을 벗어나라는 요구였다. 이제 법원은, 피해자 여성이 청바지를 입었거나 다음 날 가해 남성의 팔짱을 끼고 쇼핑을 했으니 강간이 아니라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갖게 되었다.

이 판결은 최협의설 자체를 뒤엎지는 않았다. 다만 성폭력 사건의 넓은 회색지대를 인식하도록 하면서 ‘최협의설의 최협의적 적용’을 완화했다. 2017년 춘천지방법원 홍진영 판사(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 〈국민참여재판에 따른 성폭력범죄 재판 운용의 실무적 개선방향에 대한 고찰〉을 보면, 이 판례는 2017년 9월까지 하급심에서 470회 인용되어 확실한 선례로 작동하고 있다.

2005년 대법원 판결 당시 사건의 주심은 김영란 대법관이었다. 헌정 사상 다섯 번째 여성 판사이자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사법부의 다양화에 관심이 컸고,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최초로 여성을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한 이력도 있다. 현실정치에서 일어난 권력이동이 사법부에서 젠더 권력을 이동시켰다. 그 결과로 탄생한 여성 대법관은 기념비적 판례를 만들어냈다.

 

ⓒ연합뉴스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2005년 대법원 판결은 하급심에서 확실한 선례가 되었다.


김영란 대법관은 퇴임 직후인 2010년 12월 한국젠더법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강연한다. 여기서 그는 성폭행 사건의 최협의설을 깊이 고민했다고 회고한다. 두 가지 접근법이 있었다. 첫째,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끌고 가서 최협의설을 폐기한다. 이것도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전략을 택한다. 최협의설이 상정하는 ‘현저하게 곤란’한 상황이 무엇인지는 구체적 사실을 해석하는 문제여서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대부분 판사들이 최협의설을 정면으로 고치는 데에는 부담을 가지겠지만 ‘현저하게 곤란’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크게 저항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판사들의 통념을 바꾸지 않으면 최협의설을 깨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최협의설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극복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판사들의 고정관념은 사회 전체의 통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여성 대법관은 전면전보다 우회로를 통한 침투를 택했다. 구체적 사실을 해석할 때 강간 통념을 배제하라고 판례로 주문했다.

그 결과, 성폭력 사건에서는 판사들이 한국 사회의 통념보다 앞서 나갔다. 다시 홍진영 판사의 논문을 보면 흥미로운 데이터가 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성인 남녀의 강간·강제추행 사건 중에 1심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사건을 봤더니, 그중 14건에서 배심원 판단과 재판부 판결이 엇갈렸다. 14건 중 12건은 배심원의 무죄 판단을 재판부가 유죄로 뒤집었고, 상급심에서 그대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즉, 판사들이 이견 없이 유죄로 본 사건을 배심원들은 무죄로 본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것은 왜 흥미로운가. 배심원들은 엄벌주의 성향이 작동하여 유죄 편향이 있는 반면, 판사들은 형사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무죄추정을 준수하는 훈련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죄 쪽으로 기운다고 알려져 있다. 흔한 풍경은 배심원 유죄를 뒤집고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는 조합이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만은 배심원 무죄가 재판부 유죄로 뒤집히는 장면이 훨씬 많다. 논문에서 홍 판사는, 사회 평균적인 강간 통념이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침투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진정한 피해자’에서 벗어나는 사건을 배심원들이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2018년은 법원 안팎에서 젠더 권력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해다. 법원 밖에서는 ‘미투’ 운동이 사회현상으로 불붙었다. 안희정 전 지사 재판이라는 세기의 미투 사건이 법원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법원 안에서는 여성 대법관 두 명이 새로 부임한다. 민유숙 대법관과 노정희 대법관은 법원 내 연구모임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흑백 사이 회색지대를 다루는 최고 전문가 둘이 대법원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법관 구성 다양화 문제의식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민정수석·비서실장 출신이다.

2018년 4월, 미투 운동의 한복판에서, 대법원은 문제의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내놓는다(2017두74702). 이 판례는 혁명적이라거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개별 사건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것’ ‘강간 통념으로 피해자 증언을 섣불리 배척하지 말 것’ 등 기존 판례의 흐름을 재확인하고 있다. 2005년 ‘김영란 판례’의 연속선에서 읽힌다. 류영재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사건의 실체가 모호할 때 피해자를 믿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면 정말 유죄추정 문제가 생긴다.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의 진술을 재판부가 통념만으로 가볍게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다. 실제 성폭력 판결들을 살펴본 결과, 피해자 증언 하나만으로 유죄 판결이 나오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증언의 구체성·일관성과 현장에서의 진술 태도, 정황 증거들을 최대한 종합하여 판사가 심증을 형성한다.” 류 판사는 성폭행 사건 판례들을 연구해 ‘성폭행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 판단과 사실인정론’이라는 발표문을 썼다.

동시에, 2018년 성인지 감수성 판례는 2005년 판례보다 중요하고 논쟁적인 한 걸음을 더 나갔다. 2018년 대법원 판결문은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하며,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쓴다. 성별 권력구조 문제를 명시적으로 지목한다. 이건 2005년 김영란 판례에 없는 대목이다. ‘성인지’라는 말은 성별 권력구조를 판단 과정에서 살피겠다는 선언이다. 이로써 법원은 현실의 회색지대로 한 발 더 뛰어 들어갔다. 거기는 하나의 원칙이 지배하는 깔끔한 형식논리의 세계가 아니다. 법원의 형사 절차는 모든 개인을 동등하게 간주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여기에 성별 권력구조 문제를 얹으면, 두 접근법은 원리상 충돌 가능성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법원이 현실의 회색지대로 진입하는 이상 이 충돌을 피하기도 어렵다.

성평등이라는 헌법 가치는 성별 권력구조를 직시해야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성별 권력구조를 형사 절차에서 고려하다 보면 피고인의 권리라는 헌법 가치를 침해하는 선과 만날지 모른다. 2013년 당시 김상준 부장판사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런 표현을 썼다.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와, 형사 절차에서 피고인의 권리 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충돌하는 갈등이라고 볼 수도 있다.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가치의 충돌지점에서 객관적 증거 없이, 내밀하게 발생하는 관계적 억압과 동조의 상호작용 및 그 정도를 파악할 충분한 수단이 없다는 데 고민의 본질이 있다.”

 

ⓒ시사IN 이명익지난해 3월9일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검찰에 자진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권력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없는 셈 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성별 권력관계를 직시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에는 이런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의식·사회운동·정치권력 등 여러 차원에서 천천히 이뤄진 권력이동은 그런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을 조금씩 해체했다. 그래서 이것은 권력이동에 대한 이야기다. 성별 권력구조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이 권력이동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기성 구조에 균열을 내고 있다. 자연히 파열음도 커진다.

여전히 현실은 회색지대의 수많은 ‘동의 없는 성관계’들이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않는 세계다. 저항이 현저히 곤란한 폭행·협박, 혹은 업무상 위력이 입증되지 않는 ‘동의 없는 성관계’는 무죄가 되거나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는다. 대학의 남성 선배가 신입생 여성을 위압해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갖는다 해도 처벌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면 폭행·협박·업무상 위력이 아니어도 적용할 수 있는 ‘낮은 단계의 성폭력’을 법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 회색지대가 입법 미비 상태라는 데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권력 잃은 남자들의 불만’이기만 할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회색지대의 어디까지가 입법으로 보호해야 할 영역이고, 어디부터 시민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할 영역일까. 이건 확실한 경계선이 없는 문제다. 치열한 논쟁과 더듬거리는 탐색으로 공동체가 합의를 만들어갈 문제, 그러니까 정치의 문제다. 국회에서는 비동의간음죄가 4당 의원들의 공동발의로 제출되어 있다. 여성이 거부 의사를 밝힌 성관계라면 성폭력으로 보자는 취지다. 이른바 ‘노 민즈 노(No means No)’ 룰이다. 이보다 강력한 주장으로는 ‘예스 민즈 예스(Yes means Yes)’도 있다. 여성의 명시적 동의가 있어야만 동의된 성관계고, 그 외에는 성폭력으로 보자는 얘기다. 여성 보호만 생각하면 대책은 더 셀수록 더 좋다. 하지만 반대편에도 포기할 수 없는 헌법 가치가 달려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것은, 2013년 논문에서 김상준 당시 부장판사가 지적하듯, 충돌하는 두 헌법 가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형사 절차는 국민의 삶에 최소한으로만 관여해야 하고, 피고인은 자기를 방어할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이런 원칙들이 밀려날 우려는 ‘권력을 잃어가는 남자들의 불만’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예스 민즈 예스’는 완벽한 동의가 없는 모든 성관계를 강간으로 본다는 점에서, 한때 법원이 머물러 있던 안락한 흑백의 세계를 뒤집은 모양새다. 여기에도 회색지대라는 현실은 없다. ‘예스 민즈 예스’는 모든 회색지대를 동의서와 명시적 계약관계로 대체한다. ‘노 민즈 노’는 이보다는 온건하면서 여성 보호가 신장되므로 국회에서 주로 논의되는 대안이다. 미국 법원의 성폭력 판단도 이쪽으로 가는 추세다.

반론도 있다. ‘노 민즈 노’는 폭행·협박·위력 등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성이 남성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 이것이 오히려 여성의 주체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폄하한다는 주장이 있다. 지나치게 보호주의적이어서 오히려 가부장적이라는 얘기다. 형법이 시민의 삶에 이 정도까지 들어가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문제 제기도 있다. 현재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일하는 조국 수석이 서울대 교수 시절 이런 입장에 선 바 있다. 이런 입장의 전문가들은 현행 강간죄의 폭행·협박을 지금보다 넓게 해석하고, 업무관계가 아닌 사이에도 위력을 인정하는 온건한 보완 입법을 선호한다. 여성 보호를 강화하되, 형법이 회색지대로 지나치게 들어가는 것은 막자는 취지다.

안희정 전 지사의 2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모호한 사건을 유죄로 추정한 것이 아니었다.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해자 증언을 배척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성인지 감수성을 적용한 정도가 일반적 성폭력 사건과 견줘 꽤 적극적인 편이라는 평가도 만만찮게 있다. 안희정 전 지사의 2심 판결문은 움직일 수 없는 자명한 원칙을 입증하고 반석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판결문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여섯 글자가 회색지대로 뛰어드는 결단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문서다. 이 문서는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요구하는지 알려준다. 우리는 회색지대에 서 있다. 명백한 원칙의 세계에서 보면 엉망진창 같지만, 여기가 실제 삶에 더 가깝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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