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강제된’ 근대화 과정에서 팔자가 바뀐, 즉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도시들이 꽤 많아.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과 관련해 뜨거운 화제가 된 목포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5대 도시로 꼽힐 만큼 번성했고, 전라북도 군산도 조선 쌀 수탈용 항구로 각광받으면서 완연히 새로운 도시가 되었단다. 전라북도 익산 또한 비슷했지. 1914년 일제는 여산군(춘향전에도 등장하는 전라도 첫 고을), 함열군 등을 익산과 합치고 군청 소재지를 이리(裡里)에 두었는데 이 지역은 조선 시대만 해도 ‘십리노화불견소(十里蘆花不見巢)’라 해서 사방 십 리에 볼 것이 갈대밭밖에 없는 습지였어. 익산은 번성하는 군산항의 배후 도시로, 그리고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루게 되지.
경술국치를 전후한 즈음, 익산 인구 중 60%가 일본인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유입됐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일본인들은 만경강 유역을 농토로 개발하고(물론 이 개간 사업에 피땀을 쏟은 건 조선인이었겠지만), 또 기존 농지를 사들이면서 대농장을 세웠다. 당시 전북의 일본인 소유 농장 가운데 절반이 익산 지역에 있었다고 하니 알 만하지?
전라도 지역의 3·1운동은 항구도시 군산에서 비롯됐어. 박연세·김수영 등 영명학교(군산제일고등학교 전신) 교사와 학생들은 3월1일 경성에서 터져 나온 만세 소리를 이어가기로 하고 비밀리에 만세 시위를 조직했어. 디데이는 3월6일, 군산 장날이었지. 하지만 낌새를 알아챈 일본 경찰이 그 전날인 3월5일 학교를 덮쳐 박연세 등을 체포했고 교사와 학생들은 당일 만세 시위를 결행한단다. 이는 한강 이남에서 터진 첫 만세 시위였어.
이후 전라북도 전역으로 만세 시위가 퍼져 나갔지만 익산은 좀 여의치 못했어. 3월10일과 3월16일 천도교인 중심으로 시위가 조직됐지만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 군대와 경찰에 막히고 말았지. 일본인 밀집지역인 익산의 만세 시위 소식은 일본인들을 긴장시켰어. 일본인 지주들은 자경단을 구성해 자체 경비에 나서는 한편, 일본 경찰과 군대를 익산으로 끌어들였지.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었어. 1897년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에 세워진 남전교회 사람들이 중심이 됐고, 그들은 군산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다가 잡혀간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를 잘 알고 있었어. 그가 바로 남전리 출신이었거든.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는 1894년 조선을 뒤흔든 갑오농민전쟁의 동학군 출신이었어. 그가 즐겨 인용한 성경 말씀은 자유를 찾아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 출애굽기였다고 해. “억압과 폭정 앞에 울부짖는 통탄의 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시키시는 하나님께서 (···) 조선 민족도 일제의 폭압과 억압의 쇠사슬을 끊고 우리 민족을 일본 제국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다(〈익산시민뉴스〉 2011년 4월2일자).”
분위기도 무르익어갔어. 조선 사람들은 익산역을 무대로 일본 당국으로서는 실로 얄미운 ‘정거장 시위’를 벌였다. 남전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이 먼저 기차에 올라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분위기를 알아챈 승객들은 기차가 익산역에 서면 우르르 몰려나와 기차 안팎에서 만세를 부르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나버린 거야. 일본 경찰은 닭 쫓던 개가 될밖에. 요즘 말로 ‘플래시몹’ 시위라고나 할까.
마침내 익산 사람들이 일제히 들고일어설 날이 정해졌어. 4월4일, 익산 장날이었지. 이를 앞장서 준비하고 시위에서 선봉에 서기로 한 사람은 문용기였어. 역시 남전교회의 장로였지. 그는 좀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었어. 일찍이 한학을 배워 서당 훈장까지 하다가 신학문을 배우겠다고 무려 스물네 살에 소학교 과정에 들어갔고, 1911년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우리나라 오지의 대명사라 할 ‘삼수갑산’의 갑산, 즉 함경남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서 통역으로 돈을 벌어 아낌없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희사하기도 했으니 어찌 범상한 사람이었겠니.
“붉은 피로 대한의 신정부를 돕겠다”
마침내 4월4일 오후 12시, 익산 장터의 인파 사이에서 조선 독립의 깃발이 솟았다. 그 깃발 아래에서 문용기는 우렁차게 독립선언서를 읽고 우리가 왜 만세를 불러야 하는지 쩌렁쩌렁하게 설파했지. 그의 열변은 익산 사람들을 에워싼 공포의 둑을 무너뜨렸어. 조선 독립 만세!
문용기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조선 독립의 깃발을 들었다. 그가 시위대를 이끈 곳은 일본인 대지주가 운영하던 오하시(大橋) 농장이었어. 익산 농민들의 한이 서린 곳, 그리고 조선의 피를 빨아 배를 불리던 곳, 아울러 일본 제국의 공권력이 가장 힘써 지키던 곳. 문용기도 그걸 모르지 않았어. 그는 군중의 맨 앞에서 오하시 농장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 군경과 깡패들 앞으로 나아갔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에게 “나물 많이 캐오시오” 하고 웃었다는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는지도 몰라.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고 헤어지거나 역에서 일본 경찰과 하던 술래잡기 같은 시위가 아니라 목숨을 건 전쟁 같은 시위였기에 더욱 그는 선봉을 놓치지 않았는지도 몰라.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시위대와 문용기 앞에서 일본인들도 눈이 뒤집혔어. 표적은 문용기. 한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두르며 태극기 든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만세를 불렀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버린 후 난도질을 했어. 피를 토하고 죽어가면서도 그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도와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
당시 군산에 주재하던 선교사 윌리엄 불, 한국명 부위렴의 기록은 이렇다. “(일제 헌병 앞에서) 시위 지도자는 가슴을 내민 채,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만세 소리만은 막지 못한다’ 하였다. 군인이 칼을 뽑아 그의 가슴을 찌르자 그는 피를 쏟으며 땅에 넘어졌다. 가슴에 꽂았던 칼을 빼는 군인을 향해 그는 ‘네가 나를 죽인다만 하나님께서 이 일로 네 나라를 벌주실 것이다’라고 외쳤다.”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남편의 시신을 가까스로 수습한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도 문용기가 입고 있던 피 묻은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항아리에 넣고 땅에 묻었어. 언제든 해방이 오면 그 옷이라도 꺼내 해방된 나라를 보여줄 요량이었을까. 지금도 그 옷은 독립기념관에 가면 볼 수 있어. 서당 훈장 출신으로 미국인 통역까지 했던 장로, 한문과 영어에 모두 능통했던 지식인으로서 얼마든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조선인 문용기가 보여준 용기의 처절한 증거인 셈이야.
그의 양팔을 자르고 난도질한 일본인이 밉지? 아빠도 그래. 하지만 문용기 선생의 용기를 먼저 기억하자꾸나. 일본 제국주의는 패망했지만 네가 살아야 할 세상에서 용기를 내 뭔가에 맞서야 할 일들은 파도처럼 계속 밀려들 거다. 쉽사리 타고 넘을 수 있는 파도도 있겠지만 온몸이 휩쓸리는 큰 파도가 올 때 힘닿는 데까지 용기를 내보는 것, 최소한 등을 보이고 도망가지 않는 것. 도망가더라도 저 앞에서 파도에 맞서는 사람들을 응원해주는 것. 아빠는 그게 3·1운동 정신이라고 생각해. 일본인들이 얼마나 지독했는가를 탓하는 것은 그런 다음 일이고 말이야. 기미년의 영웅들을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서란다. 그들이 용감했기에 우리는 오늘을 누릴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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