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화 선수에게 듣는 ‘스포츠계 미투’ 그 이후
  • 김연희 기자
  • 호수 597
  • 승인 2019.02.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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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모굴 스키 사상 최초로 결선에 진출한 서정화 선수는 스포츠혁신위원회 위원이다. 그를 만나 ‘스포츠계 미투’ 이후 이슈에 대해 물었다.

‘콕 세븐(Cork 7)’은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도는 모굴 스키 기술이다. 주로 남자 선수들이 선보이는 기술로 여자 선수들은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모굴 스키 경기에 출전한 선수 30명 중 단 두 명이 이 기술을 구사했다. 그 가운데 한국 국가대표 서정화 선수가 있었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모굴 스키 사상 최초로 결선에 진출해 14위를 기록했다.

점수만을 고려한다면 불리한 선택이었다. 모굴 스키는 울퉁불퉁한 눈 둔덕을 빠른 속도로 내려오며 점프, 턴 등의 기술을 겨루는 프리스타일 스키의 한 종목이다. 모굴 스키 심판들은 난이도보다 완성도에 더 큰 가중치를 둔다. 여자 선수들은 평소 콕 세븐을 연습해도 실전에서는 쉬운 점프를 완벽하게 뛰는 전략으로 경기를 치른다. 서정화 선수는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고민한 끝에 “하고 싶은 걸” 택했다. 스키 강국은 아니지만 한국에도 어려운 점프를 뛰는 선수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시사IN 신선영2월12일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서정화 선수(사진)는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할 선택권을 빼앗는 건 은퇴 이후 삶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굴 스키를 시작한 뒤 그는 자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2006년 국내 최초로 생긴 모굴 스키 국가대표팀에 선발됐지만 공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중간고사를 봐야 하니 소집 훈련에 하루 이틀 늦게 합류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그에게 감독이 내민 건 ‘국가대표 포기 각서’였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겠다는 그는 국내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어도 국가대표가 될 자격이 없었다. 한국 엘리트 체육 시스템은 선수들에게 ‘운동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2019년 ‘스포츠계 미투’를 계기로 경기력과 성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빠르게 공감을 얻었다. 1월25일 정부는 스포츠 개혁 일환으로 소년체전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소년체전을 전국체전 고등부와 통합하고, 교실이나 학업과 유리돼 있던 선수, 운동과 담을 쌓았던 학생 등이 모두 참여하는 학생체육축제 형식으로 전환하겠다는 취지다.

“곧 스키 그만둘 아이”라는 소리를 듣던 서정화 선수는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 2018년 평창까지 3회 연속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학업도 놓치지 않았다. 2015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에서 동아시아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서정화 선수는 체육계 구조 개혁을 위해 민관 합동으로 출범하는 스포츠혁신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다. 현역 선수로는 유일하다. 2019 국제스키연맹 세계선수권 대회를 마치고 막 귀국한 서정화 선수를 2월12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만났다.


ⓒ연합뉴스체육계 구조 개혁을 위한 ‘스포츠혁신위원회’ 1차 회의가 2월11일 열렸다.


모굴 스키는 낮선 종목이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가족들 모두 스키를 좋아해서 네 살부터 스키를 탔다. 열 살 무렵에 삼촌의 권유로 모굴 스키를 시작했다. 그때 막 한국 스키장에 모굴(눈 둔덕) 사면이 만들어졌다. 모굴 스키는 30초 동안 슬로프를 내려오면서 여러 가지 기술을 선보여야 한다. 속도 경기와 기술 경기의 특성이 결합돼 있다. 다양한 걸 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또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하기 때문에 기술 못지않게 정신력도 중요하다.

2006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됐지만 합류하지 못했다.

국가대표 첫 소집이 중간고사 기간과 겹쳤다. 하루 이틀 정도 늦게 들어가거나 훈련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당시 감독이 하루라도 훈련에 불참하면 국가대표를 할 수 없다면서 ‘국가대표 포기 각서’라는 문서를 보냈다. 나는 아마추어 동호회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들 분류상 ‘엘리트 체육인’이 아니었다. 전문 운동인과 생활 체육인은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고, 저 같은 아마추어 선수에게는 국가대표 자격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학생이 시험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며칠만 미뤄달라는 건 상식적인 요청으로 보이는데.

ⓒ연합뉴스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모굴 스키 예선에서 서정화 선수가 슬로프를 내려오며 점프하고 있다.
사실 당시에는 불합리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모두 둘 중 하나만 하니까.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한테 체고로 전학 가겠다고 했었다. 그때 부모님이 “네가 좋아하는 스키와 공부는 병행할 수 있다”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내가 스키를 너무 좋아했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스키를 선택할 걸 아니까 부모님이 둘 다 하게 하셨다(웃음). 결국 중간고사를 안 볼 수는 없고, 또 운동선수는 그래야 하는 줄 알고 포기 각서를 썼다. 개인 훈련을 하다가 국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감독이 바뀌어서 다음 해에 대표팀에 합류했다. 학습권 침해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야 하게 됐다. 공부와 운동을 같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자고 마음먹게 됐다. 선수 생활의 목표 중 하나였다.

미국 대학에 진학해서도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등 선수 생활도 계속했는데 한국과 어떤 점이 달랐나?


한국에서는 선수들이 대부분 체육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데 미국에서는 자기가 관심 있는 전공을 택한다. 물론 스포츠학과로 진학하는 비율이 높지만 그건 학생 선수들이 스포츠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훈련이나 시합 때문에 수업에 빠지게 되면 시험을 미리 치르게 해주거나 에세이 과제를 이메일로 제출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해준다. 학생 선수가 운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운동을 한다고 해서 공부해야 할 분량 자체를 줄여주는 경우는 없다. 가장 크게 차이를 실감한 건, 한국에서 “국가대표 선수로 올림픽 출전했다”라고 하면 “운동만 했구나”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좋아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해준다. 또 미국 선수들은 운동량 자체를 한국만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효과적인 운동 방법을 찾아 짧은 시간 집중해서 한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다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선수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이었다. 설상 종목에서는 세계선수권 대회나 월드컵도 한국에서 거의 열리지 않는다. 보통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개최된다. 1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하면서 스타트라인에 섰을 때 뜨거운 응원을 받은 건 평창 동계올림픽이 처음이었다. 모굴 스키를 시작할 때 한국에는 관련 인프라가 아무것도 없었다. 대회에 나가면 만날 듣는 소리가 “곤니치와”였다(웃음). 평창 이후에도 지원이 계속돼서 다음 세대는 제대로 된 시스템 위에서 선수가 성장할 수 있으면 한다.

심석희 선수의 고발로 스포츠계 미투가 촉발됐다. 성폭력 사건이 반복되는 체육계의 특수성이 있을까?


국가대표 내에서 특히 쇼트트랙의 간판선수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건 충격이었다. 지난해 3월 모굴 스키 남자 국가대표 선수들의 성추행 사건 이후 스키 종목 내에서 발생하는 성추행 사례를 여럿 들었다(지난해 3월 일본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 월드컵에서 모굴 스키 남자 국가대표 선수 두 명이 술에 취해 여자 선수들을 폭행하고 성추행했다. 가해자인 최재우·김지헌 선수는 대한스키협회에서 영구 제명됐다). 선수들이 대부분 어릴 때 운동을 시작해서 지도자들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노’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또 감독이나 코치의 눈 밖에 나면 경기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기력은 이 선수 삶의 전부이다. ‘나만 좀 참으면 된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또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한국 체육 지도자들의 남자 비율이 특히 높다. 미국이나 일본도 감독·코치는 남자인 경우가 많지만 코칭스태프 가운데 여성들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2017년부터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 선수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계가 패쇄적이다. 특정 종목의 어느 위치에 있으면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다. 특정인들이 체육계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반면 선수들 목소리가 반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코치나 감독은 선수를 지도하는 사람인데, 이들을 선발할 때도 선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 위원장이 탁구 선수 출신인 유승민 IOC 선수위원이다. 유 위원이 선수들 목소리가 체육회에 반영되도록 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최근 선수위원회에서 다룬 안건은 은퇴 선수 지원 사업이다. 체육단체에서 행정적으로 상담사를 뽑으면 그 상담사가 실제로 선수의 경력이나 이후 진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이런 경우 선수 출신이 참여하면 훨씬 더 실효성 있는 사업이 될 수 있다.

앞으로 1년간 스포츠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고 싶은가?


앞서도 말했지만 선수 생활을 하면서 목표 중 하나가 운동선수는 운동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거였다. 훈련을 소홀히 하라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한다’는 ‘운동만 한다’와는 분명히 다르다. 학습권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시스템은 옳지 못하다. 지금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학생 때부터 운동만을 강요하는 엘리트 체육 시스템이 꼽힌다. ‘운동기계’를 만드니까 코치나 감독이 자기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학생 선수들에게 선택권을 빼앗는 건 은퇴 이후의 삶을 방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는 건가?


그렇다. 또 국가대표 포기 각서 얘기를 하게 되는데(웃음), 교육받을 권리와 학습권은 인권이고 헌법적 권리이다. 함부로 침해될 수 없다. 인권이란 무엇인지를 규정한 게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법 공부를 해보고 싶다. 본인에게 권리가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학생 선수나 그 권리를 침해당하는 학생 선수들을 돕고 싶다.

후배 혹은 동료 운동선수들의 미래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은퇴 선수 중에 자기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또는 외국어를 배우고 싶었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방법을 몰랐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사실 운동했던 경험은 어떤 길을 가더라도 도움이 된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다 똑같지 않을까. 좋은 자질이 있으면서도 교육 단절로 인해 다른 분야로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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