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28일 베트남에서 열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을 향한 양측의 외교 노력이 한창이다. 특히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만은 어떤 식으로든 가시적인 비핵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전향적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2월6일 평양을 방문해 북한 측과 실무협상을 벌인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이하 특별대표)가 미국 측 협상 기조의 전환을 이미 암시한 바 있다. 방북 직전인 지난 1월31일 스탠퍼드 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서다. 연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핵무기 목록 신고는 협상 초반(이전 입장)이 아니라, ‘비핵화 완료(이후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이전 시점’으로 늦춘다. 둘째, 비핵화 완료 이전이라도 북한의 구체적 비핵화 실천에 대해서는 미국도 상응조치로 화답한다. 비핵화(북측)와 상응조치(미국)의 ‘동시 병행’을 시사한 셈이다.

ⓒ연합뉴스2월3일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는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


비건 특별대표의 이 스탠퍼드 대학 연설은 최근 북·미 관계의 흐름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미국 국무부는 자체 홈페이지에 이례적으로 비건 대표의 연설문과 일문일답 내용은 물론이고 해당 동영상까지 업로드했다. 비건 특별대표의 발언이 개인 의견이 아니라 국무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등 유관 부처의 긴밀한 조율 끝에 나온 결과물이란 의미다.

핵무기 목록 신고 시기 뒤로 미룬 ‘깊은 뜻’

비건 특별대표에 대한 북한의 대우도 크게 바뀌었다.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지난해 8월 미국의 대북정책특별대표에 임명된 그를 기피하는 등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비건 특별대표의 직함은 차관보급에 불과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평가되는 스탠퍼드 대학 연설문이 나온 이후 북한 측은 그를 협상 파트너로 공식 인정하기 시작했다. 2월6일, 북한 당국이 차관보급인 비건 특별대표를 판문점이 아닌 평양으로 초대해 협상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발언에 상당한 비중을 두게 되었다는 방증이다.

비건 특별대표를 통해 제시된 미국의 전향적 태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북한 핵무기 목록 신고 시기를 뒤로 미룬 점이다. 비건 특별대표는 “비핵화 과정이 완결되기 앞서 우린 북한의 모든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초 미국은 비핵화 과정의 첫 단계로 ‘포괄적 핵신고’를 고집해왔다. 북측은 핵무기의 수와 배치 지점 등을 밝혀버리면, 이런 정보가 북한 공격 등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협상 초반의 핵무기 신고 요구에 반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비건 특별대표가 신고 시점을 협상 초반이 아니라 ‘비핵화 완료 이전’으로 늦춘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비핵화의 본질적 첫 단계인 핵 목록 제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지난해 6월 1차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막아온 걸림돌을 제거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건 특별대표가 ‘향후 비핵화 협상에서 전제 조건을 달지 않겠다’라고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연설에서 “과거엔 (미국이) 상대를 향해 ‘당신이 먼저 모든 조치를 취하면 우리도 상응조치 여부를 고려해보겠다’는 식이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북한의 구체적 비핵화 조치에 대해 “동시적이고 병행적으로(Simultaneously and in parallel)’ 상응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EPA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5일 연방의회 국정연설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일정을 밝혔다.


더욱이 ‘비핵화 완결 전 제재 해제 불가’라는 미국 측의 원칙을 신축적으로 적용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내놓았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른바 ‘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로 내세워왔다. 비건 특별대표 역시 스탠퍼드 대학 연설에서 FFVD라는 용어를 네 차례나 언급했다. 다만 연설 뒤 일문일답 과정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비핵화가 완결되기 전까지 미국이 대북 제재를 풀지 않을 것이란 말은 맞다”라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비핵화를 모두 완결할 때까지 미국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가 확인되면, 트럼프 행정부 역시 ‘비핵화 완결 이전이라도 상응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견해를 공식화한 셈이다.

바로 이 대목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성패를 가르게 될 핵심 사안이다. 비핵화 완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다. 협상의 한 축인 북한이 어떤 대가도 없이 오랜 세월 일방적으로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북한은 이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을 통해, 미국 측 ‘상응조치’를 전제 조건으로 비핵화의 구체적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하나는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에서 밝힌 영변 핵시설에 대한 항구적 해체다. 다른 하나는 지난해 10월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밝힌 ‘플루토늄 및 우라늄 시설 해체 및 파괴’ 약속이다. 이에 더해 북한은 ‘플러스알파’ 조치까지 하겠다고 했다. 상당수 미국 전문가들은 이 ‘플러스알파’를 북측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의 해체로 파악한다.

“경제 혜택+북한의 안전보장 필요”

북한이 미국에 원하는 상응조치란 무엇일까? 북한이 이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적 국정 방향을 경제 건설로 옮긴 만큼, 상응조치는 결국 경제제재 해제 혹은 완화일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제재가 풀리지 않는 한 북한은 경제발전은 물론 회생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유엔은 북한이 최초로 핵실험을 감행한 2006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8차례나 북측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최대 수출품인 석탄과 광산물·해산물 수출이 봉쇄됐고, 경제 건설에 필수인 원유는 물론 휘발유 같은 석유제품 수입까지 제한된 상태다. 특히 2017년 9월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과 각종 기관들까지 상품·용역·기술 등에 걸친 일체의 대북 거래행위를 금지했다. 미국과 관련 있는 초국적 금융기관들에 대해서도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막았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가장 절실하게 원할 것으로 보이는 상응조치로는 대북 금융거래 금지의 해제가 꼽힌다. 미국 행정부의 자체적인 대북 제재만 풀어도 북한의 경제 사정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유엔이나 다른 나라의 대북 경제제재 역시 미국이 원한다면 그 해제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 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는 “비건 대표가 연설에서 놓친 게 하나 있다. 북한 처지에서 볼 때 핵무기를 모두 해체하면 군사력에서 한국에 크게 뒤처지게 된다. 이런 북측의 우려에 대해, 비건은 미국이 어떤 식의 안전보장(security guarantee)을 제공할 수 있을지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핵 제거에 따른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를 해소하지 않은 채, 단순히 경제적 혜택을 약속하는 것만으로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응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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