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됐으니 국가의 명을 따르라?
  • 김연희 기자
  • 호수 594
  • 승인 2019.02.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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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훈련관리지침에 따르면 ‘선수는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지도자와 선수의 위계를 강조하는 이런 지침이 존재하는 한 스포츠계의 폭행·성폭력은 막을 수 없다.
‘스포츠계 미투’를 촉발시킨 것은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이었다. 2018년 1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충북 진천군에 있는 선수촌에서 심석희 선수가 이탈했다. 이를 계기로 조재범 당시 국가대표 코치가 심 선수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난 1월 조재범 전 코치가 심 선수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이 추가 제기됐다. 심 선수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세종은 “범행 장소에 태릉 및 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시설이 포함돼 있다”라고 밝혔다.

선수촌 내부 지침이 어떠하기에 폭행을 막을 수 없었을까. ‘국가대표 훈련관리지침(이하 지침)’은 국가대표의 목적·자격·수칙 등을 정한 31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태릉과 진천선수촌에 입촌하는 선수와 지도자, 훈련 관계자는 이 지침에 딸린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시사IN 신선영국가대표 훈련관리지침(위)에 따르면 선수들은 ‘민족의 영광을 새롭게 창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선수 인권 관련 항목은 단 하나


이 지침은 1988년 만들어진 이후 2018년 4월까지 열세 번 개정됐다. 제정 뒤 일부 세부적인 내용만 수정됐을 뿐 ‘국가주의 스포츠관’은 그대로 유지됐다. 지침에 딸린 서약서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국위를 선양하며, 국민의 기대와 성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체력 증진과 기량 연마를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한다.’ ‘1.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영광을 새롭게 창출하도록 노력한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는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가 너를 선발했으니 영광으로 여기고 통제를 따르라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과 성과 지상주의는 스포츠계에 폭력과 성폭력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되풀이되는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다. 경기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용인되며 감독과 선수가 철저히 수직적인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지도자와 선수 사이 위계를 강조하는 내용은 ‘국가대표 지침’ 곳곳에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제8조(임무)에서는 국가대표 선수의 첫 번째 임무로 ‘선수촌 내외 생활과 훈련 중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을 꼽는다. 제9조 국가대표 훈련 제외 대상에는 ‘지도자의 정당한 지시를 이행하지 아니한 자’가 포함된다. 선수들을 통제할 권한을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조항도 있다. 제16조(외출·외박) 2항은 ‘선수의 외출, 외박은 별첨 제2호 서식에 의거 소속 지도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16조 4항은 ‘담당 지도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수의 개별 외출을 제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제17조(면회) 2항은 ‘체육회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면회를 제한할 수 있다’라고 돼 있다. 정윤수 교수는 “신체적 통제는 정신적 통제로 이어진다. 지도자 말고는 그 누구도 이 공간에 개입할 수 없다는 생각은 선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성폭력으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라고 말했다.

지침 제14조(생활시간)를 보면 새벽 6시 기상부터 밤 10시 취침까지 합숙훈련 일과를 촘촘하게 정해놓았다. 프랑스 등에서는 선수촌에서 훈련을 하더라도 오후 5시 일과가 끝나면 자율성이 보장된다. 지침의 31개 조항 중 선수 인권과 관련된 항목은 딱 하나다. 제15조(교육) 3항은 ‘대한체육회가 실시하는 스포츠인권 교육에 연 1회 이상 참가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심석희 선수 폭행 사건이 불거진 이후인 2018년 4월 개정된 사항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0년 ‘스포츠인권 가이드라인’을 제정했지만 관련 내용은 지침에 반영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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