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위험의 글로벌한 외주화
  • 문정우 기자
  • 호수 593
  • 승인 2019.01.31 13: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래전부터 삼성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거울은 우리가 법치를 운운하기에 한참 멀었다는 점을 냉정하고도 잔인하게 일깨운다. 이 기업은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 때부터 이건희 회장을 거쳐 지금의 이재용 부회장 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숱한 범법을 저질렀다. 공짜 상속과 기업 이익을 위해 권력자와 공무원을 매수하는 짓을 반복해 가중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번번이 법망에서 빠져나갔다. 함께 범죄를 도모했더라도 현직 대통령은 감옥에 가지만 이 기업 부회장은 무사하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LG는 물론이거니와 올망졸망한 다른 여러 기업과 비교조차 하기 민망할 정도로 적은 액수의 상속세를 물고도 결국 은근슬쩍 입을 씻고 말았다. 정치인은 젖혀두고라도 이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숱한 금융·세무 공무원, 판검사, 언론인 가운데 법의 심판을 받은 이는 아주 드물다.

삼성은 다른 어떤 기업 못지않게 거래하는 영세 기업이나 업자에게 모질게 갑질을 하기로 악명이 높지만 문제 된 적도 별로 없다. 규모로 보면 대한항공 일가붙이가 저지른 치졸한 패악질과는 차원이 다를 텐데도 법은 관대하다. 법 못지않게 무서운 인터넷도 힘을 쓰지 못한다. 노골적으로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했고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를 외면하거나 오히려 핍박했다. 이 거울은 대한민국에 인권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하게도 만든다.

ⓒ한성원

2008년 미국 금융위기를 취재한 미국의 탐사 전문기자 맷 타이비는 미국을 넘어 세계경제를 송두리째 망가뜨릴 뻔한 월가의 금융 전문가들이 한 명도 감옥에 가지 않는 점을 개탄한 적이 있다. 그는 미국 국민이 월가가 미국의 부를 일구었다는 생각에서 그곳에 득실대는 사기꾼과 도둑마저 존중하기 때문에 법도 그들에게 무를 수밖에 없다고 봤는데 사정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법이 삼성에 약한 것은 법률가들이 매수된 탓도 있겠지만 우리 국민이 삼성을 여전히 곱게 봐주기 때문이다. 삼성이란 거울은 우리 국민에게 자부심이란 후광을 선사한다. 인텔이니, 애플이니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을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삼성을 보노라면 덩달아 스스로 세계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인재가 된 듯한 기분에 젖는다.

유감스럽게도 삼성이 반사해주는 이 자부심에는 거품이 많이 끼었다. 삼성이 교묘하게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만 알리면서 스스로를 과대 포장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에 경도된 경제 전문가나 언론이 진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탓도 있다. 일단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위치부터 정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는 크게 시스템과 메모리 두 가지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논리와 연산, 제어 기능을 수행한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처럼 제품의 두뇌 구실을 한다. 시스템 반도체는 실제로 사람 뇌를 닮았다. 메모리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용도이다. 흔히 말하는 S램과 D램이 표준 제품이다. 최근 몇 년간 모바일 기기 수요가 늘어나고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이 서버를 대거 확충하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두뇌라기보다 ‘팔다리'

삼성뿐만 아니라 SK하이닉스까지 한국의 반도체 업계가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꽉 잡고 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60%를 차지한다. 지난해에는 우리나라 수출의 20.8%를 점했다. 한국이 그나마 2% 후반대의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반도체 호황의 덕이 크다.

하지만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력은 시스템이다. 2016년 기준으로 시스템 반도체가 전체 시장의 77.4%를 차지한다. 메모리 반도체는 소수 표준 제품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대규모 공장 설비가 경쟁력의 핵심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다수의 상품을 소량 생산할 수 있는 설계 기술이 시장 점유의 관건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외부 수요의 변화에 취약한 구조다. 결국 한국의 반도체 업계는 세계시장의 두뇌라기보다는 팔다리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국제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이 2015년까지 내내 5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한국은 17% 정도이다.

분업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제럴드 포드가 지금의 반도체 업계를 봤다면 물개박수를 쳤을 게 틀림없다. 반도체 업계는 그야말로 분업의 세계화, 그 끝판왕이다. 공급 체인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혔는지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 업계의 서사는 대개 최상급의 실리콘 이산화물이 저장된 애팔래치아산맥에서 시작된다. 이 모래는 선적돼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실려가 순수한 주괴로 변신한다. 이것들은 다시 가로 300㎜ 표준 사이즈의 얇은 웨이퍼로 가공돼 주로 메모리칩의 공장인 한국, 파운드리라고 불리는 시스템 칩의 주문생산 업체가 몰린 타이완으로 실려간다. 여기서 실리콘 조각에 거의 독점기업인 네덜란드 기업 ASMR이 제공한 사식 기술로 회로 패턴을 새겨 넣는다. 패턴은 전체 칩 디자인의 일부분이다. 영국에 있는 회사 ARM의 작품일 확률이 높다. 디자인은 이 회사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사용자에 의해서만 특정한 목적을 위해 변형될 수 있다. 이 회사는 최근 일본 기업인 소프트뱅크에 팔렸다.

칩은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조립되고 포장된다. 그 안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자기 용기에 담긴 사식된 실리콘이 기판 회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테스트를 거치면 공정은 마무리된다. 이런 작업은 중국·베트남·필리핀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것들은 다시 중국·독일·멕시코 등의 공장으로 실려가 산업로봇, 스마트폰, 정보를 고속으로 처리하는 수백만 대의 컴퓨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기업이 필요한 재료나 화학약품을 제공한다.

반도체 공급 체인이 이처럼 복잡해진 것은 물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다. 초기에 칩 제작자들은 모든 일을 한 공장에서 처리했다. 1961년 미국의 페어차일드 사가 홍콩에서 조립과 테스트를 하며 변화가 시작됐다. 아시아에는 값싸고 손놀림이 정교한 노동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아시아가 세계의 반도체 공장이 된 데는 아름답지 못한 사연이 있다.

물리법칙을 화학이 실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반도체 공정에는 수많은 독성 물질이 들어간다. 기적을 만들어내는 칩이 인간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1986년쯤 분명히 드러났다. 미국의 반도체 회사 디지털이큅먼트는 제조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일을 했다. 자진해서 비용을 대고 매사추세츠 대학 역학 전문가인 해리스 패스타이즈에게 칩 생산 현장의 안전성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2년여에 걸친 조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인 현장 노동자들의 유산율이 평균보다 두 배나 높았다.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결과를 솔직하게 공표하고 이 사실을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에도 통보했다. 협회에 속한 회사들이 돈을 내 실시한 세 차례의 후속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패스타이즈가 첫 결과를 내놓은 지 6년 만인 1992년이었다. 1995년 무렵 미국의 반도체 업계, 보건 당국, 그리고 유럽의 규제 당국은 여성 노동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의심되는 화학물질을 공정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아시아의 반도체 제조업이 급성장했다. 민주화와 인권이 척박한 곳에서 풍선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위험과 죽음의 글로벌한 외주화였다.

삼성이나 SK하이닉스나 다른 어떤 한국의 기업도 자진해서 현장의 안전성을 조사해 공표한 일이 없다. 다만 SK하이닉스가 대학 연구팀에 의뢰해 조사한 뒤 자료를 쥐고만 있을 뿐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입수한 비밀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적어도 2015년까지는 현장에서 독성물질이 아무 경고 없이 사용됐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도 사정이 비슷하거나 더 나쁠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실시된 40여 차례 조사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 현장에서 근무한 여성들은 유산뿐만 아니라 생리 불순에 이은 불임, 기형아 출산, 암 등에 시달린다. 남성 노동자 가운데도 기형아를 자녀로 둔 경우가 유의미하게 많다. 역학조사에서 이처럼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온 경우는 매우 드문데도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우리 기업 문화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30년도 넘게 뒤처졌다.


중국의 칩 산업은 제조 과정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출발했다. 상하이 근처 양쯔강 삼각주에는 그와 같은 일에 특화된 공장 수십 개가 밀집해 있다. JCET, TFME처럼 이름도 낯선 이들이 1년에 수십억 달러를 번다. 그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겠지만 이렇게 축적한 기술과 자본, 그리고 무엇보다 든든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중국은 시스템, 메모리를 가리지 않는다. 제조는 물론 디자인 분야에서까지 폭주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투자 액수가 관건인 메모리칩 제조에서 삼성과의 격차는 빠르게 줄어들 게 뻔하다. 미국이 긴장할 정도로 중국은 가치 사슬의 상층부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화웨이가 소유한 하이실리콘과 국영기업인 칭화유니 그룹은 매출에서 세계 최상위 디자인 회사 반열에 올랐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중국의 약진은 실로 위협적이다. 미국이나 중국의 안중에 삼성, 곧 대한민국은 없는 게 아닐까. 삼성 반도체에 비친, 대기업에만 집중투자해온 대한민국의 초상이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권을 존중하고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4차 산업혁명에 적합한 중소기업에 투자해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뼈아픈 현실이다.
참고한 활자:<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