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이브 에이드’ 장면.
지난한 1개월 반이었다. 이유는 별것 없다. 수많은 사람의 ‘퀸(Queen) 망진창’이 나에겐 조금 지겨웠을 뿐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와 관련해 수많은 사후 분석이 등장했다. 하지만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야 발휘되는 통찰력이라는 것은 대체로 무용할 뿐이다. 나는 ‘청춘 어쩌고’ 하며 퉁치는 식의 분석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퀸의 명곡이 청춘의 어떤 지점을 건드렸다’는 유의 언어가 창궐했는데 읽다가 민망해서 스크롤을 내려버렸다. 우리 그냥, ‘광고를 통해 친숙해진 퀸 음악의 파괴력이 완벽히 증명된 현상’ 즈음에서 합의를 보자. 누가 봐도 이쪽이 훨씬 설득력 있다.

사람들은 음악을 다양하게 듣지 않는다

영화적인 측면에서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그중에서도 마치 의무인 양 곳곳에 삽입된 반응 숏의 퍼레이드를 보기가 참 괴로웠다. 감독이 관객에게 감동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히트 요인은 결국 하나, 음악의 힘 아니겠나. 더 정확하게 짚자면 관객에게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최후의 20분 말이다.

감탄이라.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후기를 보며 나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편지에서 고흐는 이렇게 적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감탄하라.” 내 고민이 시작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나는 수많은 음악을 들었고, 음악의 역사를 제법 깊이 공부했으며, 그 역사를 담은 책을 번역해 출간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요청하면 그 즉시 아무것도 안 보고 대중음악의 흐름을 쭉 나열할 자신이 있다. 한데 진짜 질문은 이다음에 위치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누군가는 참 얕은 고민을 한다며 타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지하다. 이것은 나에게 일종의 벽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음악에 대해 글을 쓰고 말해도, 심지어 가끔 꽤 만족스럽게 해내도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나올 때가 잦다. 그 앞에서 나는 그저 말문이 콱 막힌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음악을 다양하게 듣지 않는다. 증거는 충분하다. 한국에서는 개선될 기미조차 없어 보이는 실시간 차트가, 해외에서는 갈수록 줄어드는 빌보드 차트 진입 곡 숫자가 이를 증명한다. 빌보드 1위만 해도 과거에는 1년에 수십 곡이 정상에 올랐다. 지금은 기껏해야 10곡 내외다. 외국 친구들도 여가 시간이 나면 게임을 하지, 음악을 듣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좋은 음악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단언하지 말라. 2010년대 이후에도 좋은 음악은 많았다. 아이돌 중에서도 그렇고, 아이돌이 아닌 경우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 좋은 음악은 많았다. 물론 과거에는 좋은 음악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다름 아닌 음악의 시대였던 까닭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음악보다 흥미롭고 중독적인 놀이가 (음악이 1960~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지천이다.


“그래서 어쩌라고”는 이 시대의 정언명령쯤 되는 것 같다. 이렇듯 직관성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평론가의 언어는 때로 허망하고, 자주 무용해진다. 비평이라는 건 그저 “좀 더 논리적으로 감탄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조금이라도 많이 감탄하기 위해 널리 알려진 음악 외에 숨은 음악도 소개하려고 애쓰지만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는 느낌이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해결책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응 앞에 흔들리지 않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나의 취향으로 최대한 꼰대질하지 않기로 한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