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예술과 기록 사이를 오간다. 존 택이라는 작가이자 이론가의 말처럼, 사진은 정체성이 없어서 한때의 기록은 예술이 되고 예술 작품이라고 찍었던 사진은 기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사진 초창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려진 프랑스의 사진가 외젠 아제(1857~1927)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연극배우를 꿈꾸다 선원을 하고 우여곡절을 거쳐 직업 사진가가 된 아제의 사업소 간판은 예술가를 위한 기록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한 번도 예술가라고 여긴 적이 없었고 그럴 가능성을 꿈꾼 적도 없었을 것이다.

발터 베냐민이 주목한 외젠 아제

 

외젠 아제의 작품 ‘일식’(아래)은 1926년 예술잡지 〈초현실주의 혁명〉에 실리며 예술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예술가나 탁월한 이론가에 의해 기록이 아닌 예술로 주목되었다. 초현실주의자의 일원이었던 만 레이에 의해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잡지에 실린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일식’이라는 사진이다. 파리 한 거리에서 일식을 보는 사람들의 사진이다. 기이한 의식 같기도 하고,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한 이 사진은 만 레이가 1926년 예술잡지 〈초현실주의 혁명〉에 선별해 실었다. 아제가 죽기 1년 전 일이다. 단순한 기록이라는 그의 사진이 작품으로 재평가받은 것은 만 레이의 조수였던 베레니스 애벗이라는 미국 출신 사진가이자 화가의 노력 덕이다. 그녀는 아제의 사진을 수집해 미국으로 가져가 뉴욕 현대미술관에 수장되도록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 후 아제는 사진사 속에 중요한 작가로 기록되고 일종의 신화에 이른다. 발터 베냐민의 역할도 컸다. 베냐민은 아제의 사진이 갖는 초현실성에 관해 논하면서 그를 의미심장한 작가 반열에 올렸다.

지금 아제의 사진은 무엇일까? 기록일까, 예술일까? 그의 사진은 여전히 양면적이다. 그가 바랐던 대로 당대의 파리를 찍은 기록이자 동시에 사진만이 가지는 특이한 시각의 예술 작품이다. 사진은 예나 지금이나 양자 사이를 오간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사진은 기록으로서의 가치와 특성이 희미해지고 예술로서 의미가 강해지기는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예술 작품이라고 찍은 사진이 나중에 기록이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존 택의 말대로 사진은 정체성이 없다. 정체성은 대개 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아제가 찍은 사진도 결국은 뉴욕 현대미술관이라는 미술 권력이 수집하고 전시해 인정해주었기에 예술 작품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으로서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진의 양면성은 이렇게 태생적이어서 기록을 위해서는 도큐먼트적 태도를 취해야 하고, 예술이 되려면 사진의 정체성을 제한해야 한다. 하지만 사진은 늘 찍는 사람의 의도 밖으로 빠져나가 변하는 게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기자명 강홍구 (사진가·고은사진미술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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