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은 자동차와 철강과 같은 오래된 전장에서 관세라는 구식 무기가 날아다녀 얼핏 식상해 보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에서 정면으로 거론된 적은 없지만 양대 진영이 서로 절대로 양보하고 싶어 하지 않는 분야는 따로 있다. 바로 반도체다. 이 싸움은 지난 세기 핵 경쟁만큼이나 절박하다. 21세기의 주도권은 오로지 이 깃발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미래의 통신, 교통, 상거래, 금융, 전력망, 군대까지 현대의 모든 핵심 분야를 움직이는 힘이 바로 이 마이크로칩에서 나온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2017년 칩 시장 규모는 4120억 달러에 달한다. 전해에 비해 21.6% 성장했다. 이 수치는 오히려 칩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전자상거래 부문은 연간 2조 달러 규모이다. 데이터가 새로운 석유라면 마이크로칩은 그것으로 또 다른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내연기관이다. 컴퓨터를 집채만 한 믿을 수 없는 물건에서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매력덩어리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 이 칩은 이제 자율주행차,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려고 한다. 21세기에는 말 그대로 칩을 만드는 자가 천하를 다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중국의 반도체 전쟁 ‘점입가경’

ⓒ한성원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부터도 양측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2014년 중국은 1조 위안(약 1500억 달러)을 국내 반도체 산업 발전에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최첨단 칩의 공급을 거의 외부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유보다 칩을 더욱 많이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칩을 많이 파는 전 세계 15개 회사 가운데 중국 기업은 없었다. 중국은 이런 상황을 뒤집고 싶어 했다. 2015년에 발표한 ‘중국 제조 2025’ 계획에 따르면 중국은 국내 칩 생산 규모를 연간 650억 달러에서 2030년 3050억 달러로 늘린다. 그럴 경우 중국은 국제 반도체 시장에서 자립 수준을 넘어 당당한 주역으로 행세하게 된다.

미국으로서는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국 기업인 인텔이 첨단 칩을 중국 기업에 파는 것을 가로막았다. 독일의 칩 회사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도 방해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날 때 남긴 보고서에서 중국 정부가 자국의 반도체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과 억지로 기술이전을 받으려 돈을 뿌려대는 것을 견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조언 중 거의 유일하게 이것만은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 같다. 그는 미국 내 최고 반도체 기업인 퀄컴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브로드컴에 팔리는 것을 가로막았다. 퀄컴의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갈까 염려해서였다. 그는 미국의 칩과 소프트웨어를 중국 기업인 ZTE에 파는 것도 금지했다. ZTE가 이란에 금지 품목을 수출했다는 명분이었다. 미국 기업의 라이선스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칩을 만들어 팔던 ZTE는 트럼프 대통령이 뜻밖에도 금제(禁制)를 푸는 선심을 베풀지 않았다면 하루아침에 파산할 뻔했다.

미국 기술산업의 심장인 실리콘밸리는 그 이름을 마이크로칩의 핵심 요소인 화학원소에서 따왔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민간 기술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미국 국방부의 오래된 파트너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는 마이크로칩을 민간용이 아니라 핵폭탄 유도장치로 처음 개발했다. 반도체 기술은 미국 방위와 군사력의 핵심이기도 하다.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개발에 열을 올리는 데는 경제 외 목적도 있다고 본다.

특히 미국의 관료들은 ‘메이드 인 차이나’ 반도체 장비를 통해 미국의 비밀이 새나갈까 걱정하는 경고의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 법무부는 2018년 11월1일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 푸젠진화와 그 타이완 파트너인 UMC 관계자를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에서 산업 기술을 훔친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미국은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는 화웨이와 ZTE가 자국을 비롯한 전 세계 차세대 모바일 5G 네트워크 시장에서 대세가 되는 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도 하다. 미국은 안보를 명분으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일본과 일부 유럽 국가까지 끌어들여 반(反)중국 5G 연대를 구성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의 딸이자 최고재무책임자인 멍완저우 부회장이 불시에 캐나다에서 체포됐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5G 망은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스마트 시티 같은 차세대 서비스의 핵심 인프라이다.

중국도 당하고만 있을 리 없다. 미국의 공격은 반도체로 우뚝 서겠다는 중국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모양새이다. ZTE 사태 이후 시진핑 주석은 핵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라고 기업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알리바바, 바이두, 화웨이 등 중국을 대표하는 기술 거인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해 칩을 만드는 데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 기업 퀄컴이 네덜란드 기업 NXP를 인수하려는 것을 성공적으로 훼방 놓았다.
인텔의 칩을 수입해 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슈퍼컴퓨터를 이미 보유한 중국은 미국 칩을 사용하지 않고도 오히려 더 업그레이드된 슈퍼컴퓨터를 내놓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은 이 슈퍼컴퓨터에 들어간 칩 4만960개를 모두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돈은 많이 들었지만 미국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셈이다.
미국은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것만이 중국을 견제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따라잡혔다가는 해킹을 당해 안보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고 걱정한다. 중국은 반도체처럼 미래의 경쟁력을 결정할 핵심 기술을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할 수 없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자본력에서나 기술력에서나 계속 미국에 눌려 지낼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한국은 더 이상 반도체 강국 아니다?

승자가 누가 될 것이냐는 어려운 질문이다. 누적된 기술이나 투입된 자본의 크기보다는 창의력이 승패를 가를 공산이 커 더욱 답하기 어렵다. 점을 치느라 끙끙대기보다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 격화로 선명하게 드러난 이 산업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게 더 유익할지 모른다. 국제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를 키울 수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갈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연하다는 듯 한국을 반도체 강국이라 부르지는 않게 되리라고 장담한다.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는 1960년 현대적 칩을 만들어낸 주역 중의 한 사람이며 인텔의 공동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누구보다도 잘 설명해준다. 그는 연산, 정보, 이미지까지 모든 것을 0과 1로 환산해내는, 일종의 스위치 회로인 칩의 크기가 2년마다 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같은 크기 칩의 능력이 2년마다 배가 되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유명한 무어의 법칙이다. 수십 년간 칩(컴퓨터도 마찬가지) 산업을 지배해온 이 법칙은 2010년께 깨졌다. 물리적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전과 같이 미세화 공정을 통해 회로의 집적량을 늘리거나 칩의 구조 변경으로 칩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게 힘들어진 것이다.

현재 최신 컴퓨터에 사용하는 마이크로칩은 대개 14나노미터(㎚)다. 머리카락 두께의 5700분의 1 수준이다. 이는 그 크기가 이제 통상적인 물리법칙에서 벗어날 만큼 작아졌다는 뜻이다. 회로가 원자의 단계까지 줄어들어 양자역학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전자들이 막혔던 회로의 벽을 마음대로 통과해 연산이 불가능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비트의 시대가 종말을 앞두었다. 과학자들은 더 이상의 기술 진보는 큐빗이란 기본연산자를 사용하는 양자 컴퓨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양자 컴퓨팅은 기본 이론만 정립돼 있을 뿐 아직은 기술적으로나 공학적으로 갈 길이 멀다.

지금은 양자역학이라는 높은 벽 아래 선발 주자가 옹기종기 모인 가운데 후발 주자가 속속 도착하는 모양새다. 무어의 법칙 아래 있었을 때보다 후미가 훨씬 선두를 따라잡기 쉬워진 것이다. 20세기형 기술은 대개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다.

지금은 좀 더 똑똑한 칩을 디자인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려고 미국이든, 중국이든, 기타 어느 나라든 모두가 공평하게 같은 출발점에 선 셈이다. 중국은 인공지능에 특화된 디자인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00억 달러를 들여 안후이성 성도 허페이에 양자 컴퓨팅을 연구하기 위해 거대한 연구소를 세울 예정이다. 기존 칩 제조업자들이 사용하는 방식과는 판이한 초전도 전선, 이온 트랩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IBM은 각자의 양자 컴퓨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기존 칩 제작기술을 개선하거나 아예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낼 목적으로 ERI 프로젝트를 가동한 상태이다. 여기에는 전기가 아니라 빛으로 움직이는 칩이 구동하는 시각 컴퓨팅, 양자역학에 기반을 둔 스핀트로닉 트랜지스터, 연산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정밀성을 포기한 이른바 ‘근사 컴퓨팅(approximate computing)’ 등이 포함돼 있다.


수십억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첨단 마이크로칩은 짓는 데 수백억 달러가 들어가는 초현대식 공장에서 제조한다. 전문화와 교역 노력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지막지하게 복잡한 상품은 똑같이 현란한 공급 체인을 낳았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1개 기업은 1만6000개 공급업체를 거느리는데, 그중 8500개는 미국 밖에 있다(제593호에 계속).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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