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엽징지100 빌딩 96층에서 내려다본 선전의 풍경. 강 너머 왼쪽은 홍콩이다.
1분15초46. 타이머가 멈췄다. 1층에서 96층까지 올라오는 짧은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서지 않았다. 수직으로 거침없이 직진하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절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도넛 모양으로 둥글게 배치된 동선마다 전면 유리벽을 만날 수 있었다. 층고가 높고 테이블 사이 간격은 넉넉했다. 띄엄띄엄 고요하게 앉아 있던 손님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휴대전화가 쥐여 있었다.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켠 채였다. 발밑의 풍경이 아찔했던 것도 잠시, 작아진 도시에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발아래 세상은 마치 장난감 블록으로 만들어둔 모형처럼 보였다.  
마천루는 도시의 부를 과시하는 랜드마크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열 손가락에 꼽아보면 그중 절반 이상이 중국에 있다. 선전에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초고층 빌딩 두 곳이 있다. 2011년 문을 연 징지100(京基100·Kingkey 100)은 선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이다. 2016년 완공된 핑안국제금융센터(平安囯際金融中心)가 115층으로 기록을 깨기 전까지 선전 최고의 마천루였다. 다만 선전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핑안국제금융센터의 최고층과 징지100 최고층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의 결은 조금 다르다. 징지100에서는 선전강을 경계로 나뉜 홍콩과 선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40년 전 중국 개혁개방 1번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국경도시’의 정체성을 설득력 있게 웅변하는 풍경이었다.  
중국은 개혁개방 40년 만에 세계 제2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9년 개혁개방 30주년을 ‘기념’했다면, 2018년 12월18일 개혁개방 40주년 행사에는 ‘경축’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시사IN〉은 지난 12월10~14일 중국 개혁개방 1번지인 선전을 찾았다. 20년 전부터 톈진에서 마카오까지 중국 개혁개방의 빛과 그림자를 카메라에 담아온 이상엽 사진가가 동행했다(24쪽 사진은 이상엽 사진가가 과거에 찍었던 필름 흑백사진이다).  
ⓒ이상업개혁개방이 처음 시작된 뤄팡촌의 현재 모습.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변변한 가이드북도 없는 도시  
징지100 빌딩 최고층은 카페를 겸하고 있다. 메뉴판을 들고 왔던 정장 차림의 직원이 취재진 일행의 대화를 듣더니 반색했다. “저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전망 더 좋은 자리로 옮겨드릴게요.” 둥베이(東北) 지역에서 나고 자란 자오자잉 씨(24)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 선전으로 왔다. 명찰에는 영문으로 ‘CHO GA YOUNG’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창한 한국어 발음이며 이름 때문에 처음에는 한국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자오자잉 씨는 좋아하는 한국 가수 덕분에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 정국의 팬이라는 소개에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냐고 물으니 “네, 저 완전 아미예요!”라고 답하며 천진하게 웃었다.  
선전은 변변한 가이드북조차 없는 도시다. 관광 목적으로 선전을 찾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인근 홍콩이나 마카오와 연계해 관광을 계획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중국 비자 문제가 번거로워 여간해서는 선전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선전의 ‘주 고객’은 비즈니스맨이다. 한국 기업인의 왕래도 잦다.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줄 아는 자오자잉 씨는 그래서 ‘귀한’ 인재다.  
선전시 평균연령은 32.5세로 자오자잉 씨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중국은 후커우(戶口·호적) 제도를 통해 장기 거주 자격을 부여한다. 후커우가 있어야만 교육·복지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선전의 경우 후커우 심사 시 만 35세 이하이거나 대학 졸업자라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할 경우에만 높은 점수를 매긴다. 다른 도시에 비해 대학이 적어 젊은 고학력 인재 유치가 절실한 선전시 정부의 고육지책이다.  
국경 쪽을 마주보며 앉아 있던 취재진에게 자오자잉 씨가 ‘더’ 보여주고 싶었던 풍경은 고층빌딩이 즐비한 시내 쪽이었다. 12월10일 오후 5시18분, 일몰 시간이 다가오자 테이블마다 놓여 있던 촛불만 남기고 실내 모든 조명의 조도가 일제히 낮아졌다. 유리벽 너머 한층 화려한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은 도시가 존재감을 뽐냈다.   

 

ⓒ이상엽다펀 유화촌은 반 고흐 등의 작품을 모작하며 유명해졌다. 위는 유화촌 갤러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어린이.
징지100에서 어렵지 않게 뤄팡촌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12월11일 방문한 뤄팡촌은 선전강을 사이에 두고 홍콩과 국경을 마주한 마을이다. 택시에서 내려 철조망 아래 서자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대한민국 외교부와 통신사에서 잇달아 메시지가 도착했다. ‘홍콩 입국 시 담배 19개비 면세 유의…’ ‘홍콩은 안심로밍 제공 국가로…’ 몸은 분명 선전에 있는데 휴대전화 GPS가 홍콩으로 위치를 착각한 탓이다. 철조망 너머에는 인민해방군이 강변을 따라 달리기나 걷기 따위 가벼운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1만5000배 오른 지역내총생산  
철조망이 늘어선 길을 따라 군데군데 위태롭게 서 있는 녹슨 표지판에는 ‘경고’라고 적혀 있었다. 밀수나 상행위 등 금지된 활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신고할 경우 소정의 상품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가이드 권국광씨는 “이것도 다 옛날 얘기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금지된 활동을 할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건물마다 붉은색 스프레이로 ‘차이(拆:헐다·부수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부동산 투자회사 징지그룹의 재산이라고 적힌 흰 종이가 바람에 나부꼈다. “돈 되는 데는 부동산이 다 땅을 사버리는 대표적인 예를 여기서 볼 수 있죠. 사회주의가 이렇게 가면 안 되는 거 같은데, 나도 이 혜택은 보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혼란스러워요.” 권씨가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앞장섰다.   
뤄팡촌 입구는 한 사람 정도가 드나들 수 있는 샛길을 제외하고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마을 안에 군데군데 문 연 상점이 있었지만, 어딘가 망연한 표정의 주인들은 손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건물이 헐리기 직전까지 버티고 있는 한 줌의 세입자였다. 건물주는 보상을 받고 이미 떠났지만, 세입자였던 이들은 철거민 신세가 됐다. 취재진이 카메라를 드는 순간 카무플라주 패턴(군복 무늬)의 옷을 입고 빨간색 완장을 찬 사람이 막아섰다. 징지그룹이 고용한 경비였다. 철문을 나설 때까지 경비들의 집요한 눈빛이 따라왔다. 입구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철거민 중 한 사람이 경비에 아랑곳 않고 취재진의 뒤를 계속 쫓았다. “외국에서 온 기자인가? CCTV(중국 국영 방송사)에서도 여기를 취재해갔는데 철거민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억울하다.”  

 

ⓒ이상엽이상엽 사진가는 중국 개혁개방을 주제로 10여 년간 각 도시를 촬영했다. 위는 2004년 칭다오 바닷가의 풍경.
 
ⓒ이상엽쑤저우의 거리에서 청결을 외치며 행진하는 주방장들의 모습.
선전 뤄팡촌 앞은 홍콩 신계(新界) 지역이다. 선전강 수심은 두 마을 앞에서 마침 가슴께 높이로 낮아졌다. 개혁개방 전인 1978년 전까지 뤄팡촌을 주요 루트로 선전을 경유해 홍콩으로 불법 도강을 시도한 인원은 연간 12만명에 달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도강에 성공해 홍콩에 안착했다. 이는 기록된 숫자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이 홍콩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선전에는 모기·파리·굴이 3대 특산품인데 다들 홍콩으로 도망가 집 10채 중 9채는 비었고 노인과 아이만 남았다’라는 내용의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익사했고, 아예 시체 수습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만 200여 명이었다. ‘도강 제지 및 사회질서 정돈 통지’ 같은 강제 조치로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뤄팡촌의 1인당 연소득은 134위안(약 2만2000원)인 데 비해, 뤄팡촌에서 넘어간 주민이 다수를 이룬 신계의 1인당 연소득은 1만3000위안(약 213만원)으로 10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개혁과 개방:1976~1982년〉 조영남, 2016).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은 하나였다. 양 지역의 경제 격차 해소가 시급했다. 그렇게 뤄팡촌에서 중국 개혁개방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30~31쪽 인포그래픽 참조). 
 
영국령으로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누리고 있던 당시 홍콩은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 홍콩과 인접한 선전은 홍콩을 통해 자본주의 요소를 중국에 도입한 첫 시험장으로 선택받았다. 1980년 8월 선전은 인근 주하이·산터우·샤먼과 함께 중국의 첫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네 지역 중에서도 홍콩과 국경을 마주한 선전의 변화가 가장 빠르고 극적이었다. 초기에는 중국 국적자라도 별도의 통행증이 있어야만 선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선전의 변화가 급격한 만큼 사회주의 체제가 흔들릴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콩으로 먼저 건너간 사람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빠르게 학습하며 이룩한 급속한 도시화는 아랑곳없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2004년 선전시는 지역 내 모든 농어촌 지역을 행정적 차원에서 도시지역으로 전환하며 관리 체제 일원화를 시도했고, 2010년에는 선전 경제특구를 선전시 전체로 확대하며 통합을 시도했다(〈도시로 읽는 현대 중국 2:개혁기〉 김도경 외, 2017).   
그렇게 1978년 인구 31만명에 불과했던 작은 어촌마을은 2018년 현재 인구 1251만명으로 중국의 첨단산업을 이끄는 도시로 성장했다. 전 세계 드론 산업을 이끄는 DJI를 비롯해 화웨이·텐센트 등 선전에서 키워낸 기업들이 중국의 성장까지 견인하고 있다. 선전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2017년 기준 2조2438억3900만 위안(약 367조3388억원)으로, 1979년 1억9638만 위안(약 321억5000만원)에 비해 1만5000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코트라 선전무역관 김영석 과장은 “선전은 합법적으로 외자 유치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세제 혜택, 기업 경영권 확보, 외환관리규제 완화 등 친외자 정책을 통해 막대한 외자 유치에 성공했다. 특히 홍콩의 막대한 시드머니, 저렴한 토지 임대료와 인건비를 토대로 선전에는 제조업이 먼저 발전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선전문기정밀기계 구궈원 대표(53) 역시 ‘기회의 땅’을 찾아 30년 전 내륙에서 선전으로 온 이민자다. 장쑤성(江蘇省)에서 태어나 직업학교를 마치고 열다섯 살에 얻은 첫 직장인 국영기업에서 받은 월급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213위안(약 3만4000원)이었다. 늘 배가 고팠다. 거침없는 개발주의를 대표하는 ‘선전 속도’라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선전에서는 사흘이면 건물 한 층을 올린다고 했다. 끼니를 걸러가며 모은 돈을 들고 무작정 선전으로 왔다.  

 

ⓒ이상엽셰싸이펑 선전미술산업협회 상무이사(왼쪽)와 구궈원 선전문기정밀기계 대표.
프랑스와 일본 등지에서 들어온 외자 기업이 전자부품 납품업체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기회라 생각했다. 1996년 직접 공장을 차렸다. 처음 몇 달간은 빚을 내 마련한 기계 두 대가 마냥 놀았다. 기계는 있는데 고객이 없었다. 일본의 산요와 한국의 삼성 같은 외자 기업을 찾아다녔다. 부품을 수입하는 물류비용을 들이느니, 자신이 만든 제품을 써보라고 설득했다. 아내와 동생 세 사람으로 시작한 회사가 이제는 500명이 근무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선전 대표 기업인 화웨이와 비야디자동차(BYD) 등에 정밀기계 부품을 납품한다.   
세금 잘 내면 민영기업 간섭 안해  
구궈원 씨와 회사는 선전시가 제공하는 ‘고도의 자율성’ 안에서 성장했다. 공장 벽에는 ‘평등’과 ‘자유’가 붉게 새겨져 있었다. 선전시는 세금만 잘 낸다면 민영기업에 간섭하지 않는다. 구궈원은 이런 방식이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빛은 그림자를 몰고 왔다. 시내 근처에 위치했던 구궈원 대표의 공장 역시 몇 년 새 조금씩 외곽으로 밀려났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땅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선전으로 쏟아진 사람과 돈은 도시 인프라 확장 속도보다 빨랐다. 세계 국가·도시 비교 통계정보 제공 사이트 ‘넘비오’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은 세계 1위가 홍콩, 2~4위가 각각 베이징·상하이·선전 순서다(초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제외). 중국 온라인 부동산 업체 소우펀홀딩스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선전의 집값 상승률은 37.7%로 중국 내 1위였다. 코트라 선전무역관 김영석 과장은 “기업의 성장과 함께 인구가 집중되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이러한 현상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혁신 경쟁력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선전시는 정책적으로 연구개발 같은 ‘머리’만 남기고 제조업 같은 ‘손발’은 나머지 도시로 보내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28쪽 기사 참조). 정작 구궈원 대표는 그런 분위기를 체감하면서도 서운해하지 않는다. 자신이 늙는 것처럼 기계가 늙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와 선전에서 제조업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지만, 도태되지 않는 기업은 없어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선전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선전을 IT의 도시로 기억하지만, 지금의 선전이 발전하기까지 저의 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빗물 한 방울이 강을 만드니까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영웅의 길은 막히지 않습니다(웃음).” 그는 자수성가한 기업인 특유의 낙천성을 지녔다. 최근 후베이성(湖北省)에 문기정밀기계 제2공장을 지었다. 선전의 공장은 점차 줄여나갈 계획이다. 물론 지역은 다르지만 제2공장의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선전 방식’이다.   
개혁개방 초기 선전이 홍콩에 기대어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면, 오늘날은 선전 없이 홍콩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전과 홍콩은 이제 사실상 하나의 생활권이다. 선전과 홍콩을 매일 오가는 학생만 해도 2013년 기준으로 1만6000명 이상이다. 특히 지난 9월 선전-홍콩 간 고속철이 개통하면서 선전 시내 푸톈(福田)역에서 15분이면 홍콩 시내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 10월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대교를 통해 선전-홍콩-마카오를 연결하는 ‘강주아오(港珠澳) 대교’가 정식 개통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면에서도 선전과 홍콩의 통합은 더욱 가속화되리라 예상된다.  
“선전에 오면 다 선전 사람"  
물론 그 이전에도 개혁개방의 틈을 타고 ‘역이민’이 있었다. 1989년 홍콩의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가난한 화가 황장은 선전 외곽인 다펀(大芬)에 정착했다. 농부 300여 명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가 다펀에 유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랑을 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유화촌(油畵村)의 시작이었다. 선전시는 자생적으로 생겨난 예술인 마을을 허무는 대신 보존하는 방식을 택한다. 2004년 유화촌을 ‘국가문화시범지’로 정하고 예술가들을 위한 저렴한 아파트와 미술관을 세웠다. 지난 12월12일 방문한 유화촌은 8000명의 화가와 1200개의 화랑이 골목마다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물론 다펀 유화촌이 유명해진 건 모작 때문이었다. 렘브란트·반 고흐·모네 등 거장들의 대표작 복제품을 수천명의 화가들이 그야말로 찍어내듯 그렸다. ‘유화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 무명 화가들이 베낀 그림은 모작 같지 않은 고품질과 싼 가격이 맞물리며 전 세계의 호텔 객실과 쇼룸 등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를테면 감정가 1억 달러(약 1127억원)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은 다펀 유화촌에서 하루 만에 탄생해 145달러(약 16만3000원)에 판매된다. 판매 규모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따르면 2017년 다펀 유화촌이 올린 매출액은 6억100만 달러(약 6776억원)에 달한다.  

 

ⓒ이상엽드론 전문회사인 DJI는 선전 대표기업 중 하나다.
중국 교육부 직속의 유일한 고등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에서 벽화를 전공한 ‘미술 엘리트’ 셰싸이펑 씨(40)는 자신을 1978년에 태어난 ‘개혁개방둥이’라고 소개했다. 푸젠성 출신으로 중앙미술학원 졸업 후 무명 화가로 상하이와 베이징을 전전하던 그는 2000년 유화촌에 안착했다. 이제는 ‘다펀아트’라는 2층짜리 번듯한 화랑의 주인이자 선전미술산업협회 상무이사를 맡고 있지만, 그 역시 처음에는 수없이 모작을 그렸다. 그가 주로 따라 그린 작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였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다 자기 작품을 갖고 있죠. 그렇지만 초기에는 내가 그린 그림이 팔리지는 않으니까 복제품을 그리게 돼요. 먹고살기 위해 모작을 그렸습니다만, 따라 그리다 보면 내 실력도 늘어요. 계속 그리니까(웃음).”   
지난 20년간 셰싸이펑 씨가 유화촌을 통해 성장한 것처럼 유화촌의 풍경 역시 매일같이 변했다. 그림을 그리다 돌아보면 어느새 번듯한 건물이 하나씩 서 있는 식이었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그 역시 모작이 아닌 자기 이름을 건 작품을 파는 작가가 됐다. 경제가 성장하며 질보다 양이었던 시기를 지나 ‘양보다 질’이 중요해졌다. 개인 작업실 개념이 생기고 매년 두 차례 예술제를 개최한다. 한때 유화촌 화가의 90% 이상이 복제품 작업에 매달렸다면 지금은 40% 정도만 모작을 그린다. 공장 라인처럼 그림을 ‘뽑아내던’ 사람들은 다시 더 싼 지역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저도 타 지역에서 왔습니다만, 선전의 가장 큰 장점은 포용성입니다. 물론 집값은 포용성 안에 포함되지 않지만요(웃음). 제가 상하이와 베이징에도 머물렀지만, 그곳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제가 이주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어차피 모두가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니까. 우리끼리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선전에 오면 다 선전 사람이라고. 기자님도 오늘은 선전 사람입니다(웃음).”  
선전 롄화산(蓮花山) 공원 정상에 오르면 높이 6m의 거대한 덩샤오핑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뒷면에는 ‘선전의 발전과 경험은 우리가 설립한 경제특구 정책이 정확했다는 걸 증명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동상 앞에는 평일 오후인데도 단체와 개인을 가리지 않고 꽃을 든 참배객이 줄을 이었다. 12월13일 오후 스무 명 남짓 단체로 롄화산 공원을 방문한 참배객은 덩샤오핑 동상 앞에서 중국 국기가 아닌 공산당 깃발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덩샤오핑의 시선을 따라 서면 곧게 뻗은 선전의 마천루와 파도 모양으로 길고 넓게 펼쳐진 선전시 정부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롄화산 공원을 내려와 선전시 정부 옆에 위치한 선전개혁개방기념홀로 향했다. ‘대조기주강(大潮起珠江:주강으로부터 파도가 친다)’이라는 제목의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전시가 한창이었다. 대형 버스는 끊임없이 관람객을 실어 날랐다. 한참 줄을 선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덩샤오핑의 공적보다 시진핑 주석의 대형 초상화와 시 주석이 쓴 글씨가 더 크고 요란했다. 40년이 지난 오늘 중국의 개혁개방은 덩샤오핑의 영광을 넘어 다음 단계로 건너가는 듯 보였다. 

 

기자명 선전/글 장일호 기자·사진 이상엽(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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