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31일 다시 찾은 국일고시원은 철거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2.64㎡(약 0.8평)짜리 방들로 쪼갰던 내벽이 철거되자 꽤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건축물대장에 따르면 고시원 2층과 3층의 면적은 140.93㎡(약 42.6평)였다. 그곳에 공용 화장실과 보일러실을 빼고 방이 29개 있었다. 화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2층에 24명, 3층에 26명, 4층 옥탑방에 1명이 살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 생활용품뿐이에요.” 철거 작업을 하던 인부 한 명이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잿더미 사이로 빈 소주병, 뜯지 않은 라면 봉지 등이 나뒹굴었다. 그 사이로 로또 복권 한 장이 있었다. 2018년 5월29일자로 발행된 복권이었다. 

ⓒ시사IN 윤무영지난해 11월9일 새벽 화재로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에 대한 철거 작업(아래)이 시작되었다.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에 화재가 난 건 지난해 11월9일 새벽 5시쯤이었다. 경찰은 301호 주민이 사용한 전열기에서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지은 지 35년여 된 건물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2007년 4월에 영업을 시작한 국일고시원은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대한 특별법’이 규정한 스프링클러 의무설치 대상(2009년 7월 이후)에 해당되지 않았다.

내부 공간을 쪼개서 만든 ‘내창방(고시원 내부 공간에 내벽을 세워 만든 방)’ ‘먹방(창문이 없어서 먹처럼 까만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는 화를 더 키웠다. 화재로 3층에 살던 거주자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사상자 대부분이 중장년의 일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혹은 고령의 기초생활수급자였다(아래 표 참조).

화재가 발생한 지 두 달째, 부상자 이춘산씨(63)는 창문 너머 까맣게 타버린 국일고시원을 바라보며 지낸다. 그가 임시로 거주하는 원룸텔은 국일고시원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담뱃불 때문에 산 것 같아.” 그가 국일고시원에서 처음 살았던 방은 한 달에 25만원, 창문이 없는 곳이었다. 방 안에서 피우던 담배 연기가 빠지지 않자 그는 고시원장에게 창문이 있는 방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옮긴 방은 7만원이 더 비싼 32만원이었다. 화재 당시 301호에서 난 불은 살던 방의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방 안의 창문은 그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창문 없는 방에 살았으면 지금 여기 없을 수도 있지.” 

이들이 종로3가를 떠나지 못하는 까닭

그는 지난해 3월 국일고시원에 입주했다. 문짝만 한 크기의 침대와 그 절반만 한 바닥이 전부였다. 짐을 풀며 이씨는 “이 집은 불나면 대책도 없다”라고 생각했다. 얇은 내벽은 전부 나무 재질인 데다 방에는 수도도 없었다. 방마다 소화기가 비치돼 있다고 했지만 없는 방이 더러 있었고, 그나마 비치된 소화기에는 먼지만 소복이 앉아 있었다. 복도는 맞은편 방문이 동시에 열리지 않을 정도로 좁았다. 그는 오랫동안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해왔던 터라 국일고시원이 화재에 얼마나 취약한 건물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손에 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방재시설이 나름 잘 갖춰진 인근의 신축 고시원들은 한 달에 40만원부터 시작했다. 이전에 그가 살았던 곳은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 여관의 옥탑방이었다. “거의 20년을 여관 ‘달방’에 월 25만원씩 내고 지냈지. 일 끝나고 밤에 들어가서는 새벽에 다시 나와야 하니까 이동하기 편한 데 숙소를 잡아야 했어.” 그마저도 지난해부터는 인력시장에 일감이 줄어서 한 달에 닷새 정도만 공사 현장에 나갔다. “인력사무소에 오는 순서대로 일을 주니까 늦게 도착하면 그날은 허탕인 거야.” 종로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새벽 6시 이전에는 종로3가의 인력사무소에 도착해야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국일고시원은 종로3가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국일고시원의 다른 피해자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춘산씨는 “인력사무소 다니는 일용직 노동자나 기초생활수급자들이 모여 살았던 고시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피해자 대부분은 종로 일대의 쪽방, 여관방, 고시원에서 장기 거주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익명을 요청하며 취재에 응했다. 퀵서비스 배달업을 하는 정 아무개씨(41)는 “근 10년간 종로 반경 1㎞ 내에 있는 고시원에서만 지냈어요.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나가야 하는 시스템이라 활동 무대인 종로에서 대기하는 게 나가기가 편하거든요”라고 말했다. 김 아무개씨(59) 역시 하루에 8000원 일세를 내는 종로구 돈의동의 한 쪽방에 2년 동안 거주했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그는 식비가 부담스러워 고시원으로 들어왔다. “요즘에는 5000원짜리 밥이 없어요. 사먹다 보면 한 달에 15만원씩 나가는데, 하루 한 끼 비용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고시원에 들어온 거죠.”


지하철 3개 노선이 관통하는 종로3가에는 국일고시원과 같은 고시원들이 쉽게 눈에 띈다. 피해자 황 아무개씨(68)는 “고시원은 가장 만만한 곳이다”라고 표현했다. ‘집다운 집’에 살고 싶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공임대주택을 여러 차례 신청했지만 번번이 탈락한 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보증금 없이 30만~40만원으로 숙식이 해결됐다. 도심 내의 저렴한 거처가 필요했던 그들에게 고시원은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된 셈이다.

ⓒ시사IN 윤무영국일고시원 화재 피해자인 이춘산씨(위)는 국일고시원 길 건너편에 있는 원룸텔에서 생활한다.


종로구청은 국일고시원 화재 사후 대책으로 6개월간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지원했다. 이후에는 심사를 거쳐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 절반 이하의 저소득 계층에 한해 공공임대주택에 20년간 거주할 수 있다. 화재 발생 두 달 가까이 지난 현재 임대주택에 입주한 사람은 긴급지원 대상자 32명 중 10명 남짓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여전히 또 다른 고시원에 거주한다. 임대주택 신청을 거부한 정 아무개씨(41)는 “종로구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이 근처에 나온 임대주택은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임대주택은 사실상 그림의 떡

이춘산씨는 1월11일 서울 중구 광희동의 월세 18만원짜리 임대주택에 입주하기로 돼 있지만 고민 중이다. “나올 때 입고 있던 옷이 전부야. 이사 비용이며 이불, 가전제품 사는 데 적어도 100만원은 넘게 들 텐데. 고작 6개월 살고 나와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감당해.”

지난 12월27일 국일고시원 희생자들을 위한 49재 및 추모제가 열렸다. 19개 주거권 관련 시민단체 모임 ‘주거권 네트워크’는 기자회견을 열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국일고시원 참사를 만든 근본 원인은 화재가 아니라 열악한 곳에 사람이 살도록 용인했던 우리의 주거 현실이다. 현행법은 오래된 고시원 등 다중생활시설에 대해서는 안전시설 기준이나 건축 기준을 지키지 않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춘산씨가 사는 원룸텔은 스프링클러와 내부 화장실이 있는 외창방이다. “이 정도면 고시원 중에는 특급호텔 수준”이라지만 여전히 몸을 겨우 누일 정도의 협소한 공간이다. 방값은 38만원. “먹고사는 게 급한데 좀 부담스럽지. 고시원, 여관 이런 데 사는 게 노숙자 되기 바로 전 단계 같아.” 국일고시원에서도 그가 사는 곳이 보였다. ‘고품격 리빙텔.’ 외벽에 붙은 글자가 그의 방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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