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서 두드러진 대목은 북핵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핵무기의 추가 생산을 북한이 이미 중단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화했을 뿐 아니라 기존 핵무기의 비핵화 과정은 앞으로 험난할 것이라는 점을 동시에 언급했다.
핵무기 추가 생산 중단에 대한 언급은 ‘조·미 관계’를 언급한 부분에 들어 있다. “6·12 조·미 공동선언에서 천명한 대로 새 세기 요구에 맞는 두 나라의 요구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왔습니다.”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신년사를 분석해보면, 핵무기의 추가 생산 중단 조치가 시험, 사용, 전파 중단과 동시에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지난해 4월20일 결정서에 명시적으로 표현은 안 됐지만 이때 핵무기 추가 생산 중단이 결정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당시에는 이 사실을 결정서에 포함하지 않았을까? 2018년 신년사와 충돌해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지난해 각종 핵 운반 수단과 핵무기 시험을 단행해 목표를 달성했다. 올해는 핵탄두와 탄도로켓을 대량생산해 실전 배치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핵무기 생산 비용, 민수 생산으로 돌린다
그런데 2018년 신년사 4개월 뒤 ‘핵무기의 추가 생산 중단’을 발표하면, 북한 내부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4월 김정은 위원장은 전원회의 연설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에까지 도달시키고 우리 국가와 인민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즉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룰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에까지 우리의 힘을 도달시켰다’라는 식으로 더 이상 핵무기 대량생산이 필요하지 않게 된 이유를 합리화했다.
2019년 신년사에서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라는 대목은 군수공업과 연결된다. 이번 신년사에서 군수공업은 두 차례 언급되었다. 즉 ‘군수공업에서 농기계나 건설기계 등 인민 소비품을 생산해 인민 생활 향상과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김 위원장은 지적했다. 북한의 선군경제 건설 노선의 변화를 추적해온 권영경 통일교육원 교수는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군수공업을 민수 생산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핵 과학자들과 미사일 기술자들을 BT(생명공학)와 NT(나노공학) 등 4차 산업혁명 분야로 돌려 단번에 도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대북 제재로 외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기존 핵·경제 병진 전략에서 지식경제강국 노선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핵무기의 생산 비용을 아껴 민수 생산에 투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핵무기 생산 중단을 언급하면서도 기존 핵무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 2019년 신년사의 또 하나 특징이다. 오히려 기존 핵무기를 비핵화하는 데 따르는 반대급부에 대한 요구가 과거보다 한층 강화됐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이 “앞으로도 언제든 또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밝히고, “완전한 비핵화”를 공표했다는 점 등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북한의 협상 전술을 보면 사소하게 여기기 쉬운 ‘조건문’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북한)의 주동적이며 선제적인 노력에 미국이 신뢰성 있는 조치를 취하며 상응하는 실천 행동으로 화답에 ‘나선다면’ 두 나라 관계는 보다 더 확실하고 획기적인 조치들을 취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훌륭하고도 빠른 속도로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즉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선제적 노력에 대한 미국의 상응 조치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걸었다. “(미국이)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미국이 제재 압박을 계속하면 종전의 비핵화 협상과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이는 북·미 협상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보여준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완전한 비핵화 역시 북·미 간 ‘새로운 관계의 수립’과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의 구축’ 이후에나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북·미 간의 새로운 관계 수립과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까지 이르는 단계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다. 특히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한 북한의 새로운 구상 중 일부가 이번 신년사에 포함됐다. 이를 토대로 전체 윤곽을 짚어보면 거대한 벽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의 대목은 남북관계를 언급한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북과 남이 평화 번영의 길로 나가기로 확약한 이상 조선반도 정세 긴장의 근원으로 되고 있는 외세와의 합동 군사연습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북한, 더 큰 반대급부 요구”
그다음 평화체제 프로세스에 대해 언급한 대목도 살펴보자.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계를 평화체계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 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 보장 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고할 만한 텍스트가 있다. 지난 12월20일자 〈조선중앙통신〉에 정현이라는 필명으로 개인 논평이 게재되었다. 북한이 미국에 원하는 상응 조치란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종식과 부당한 제재 해제’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또 ‘조선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잘못됐다고 이 논평은 지적한다. 논평은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큰 개념을 북 비핵화라는 부분적인 개념과 동일시한 데 문제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반도 비핵화란 우리(북한)의 핵 억제력을 없애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라고 논평은 덧붙인다. “북과 남의 영역 안에서뿐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 위협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비핵화이며 북·미 양국이 “다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사업”이라는 것이다.
‘조선반도 주변으로부터의 핵 위협 제거’라는 새로운 개념 규정이 등장한 셈인데 국내에서는 이를 소홀히 여긴 측면이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북한 관찰자들에게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중국의 한 소식통은 지난해 10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7~8월께부터 북한 내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 개념을 비판하며 조선반도 비핵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다. 주한 미군뿐 아니라 주일 미군 나아가서는 일본의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비핵화가 진행되면 한국이나 주한 미군보다는 일본과 주일 미군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 대북 전문가도 이와 관련해 “북한이 비핵화를 하겠다는 기본 입장은 바뀌지 않았지만 반대급부에 대한 요구가 더 커졌다”라고 지적했다. “남한에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에의 핵무기 반입 금지, 재침략 의도를 가진 일본의 핵무장 금지를 세트로 묶어서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라고 이 전문가는 지적했다. 2019년 신년사에서 언급된 외세와의 합동 군사훈련이나 전략물자나 전쟁물자 반입 금지, 그리고 중국을 뜻하는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등은 모두 이런 포석을 깔고 등장한 개념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로서 중국과 긴밀한 연계를 강조한 대목은 여러모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9월5일 김정은 위원장은 남측 특사들과 면담하면서 “종전선언은 주한 미군 철수나 한·미 동맹 약화와 무관하다”라고 말해, 중국의 주한 미군 철수 요청을 뿌리치는 모양새를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주한 미군을 넘어 주일 미군과 일본의 핵무장 문제까지 이슈화할 경우, 중국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북한은 다시 한번 판을 키우려 모색할 수도 있다. 2018년이 한반도 비핵화의 서막이었다면, 2019년 신년사는 올해 벌어질 험난한 본게임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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