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는 필요 없다고?
  • 홍덕구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 호수 591
  • 승인 2019.01.1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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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 무용론’이 계속 제기되지만 대학가에서 학생 자치가 사라지면 학생들의 권익 보호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워진다. 학생 자치라는 최소한의 제동장치마저 없다면 대학 당국의 폭주는 더 가속화할 것이다.

내가 재학 중인 대학의 일반대학원에는 총학생회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총학생회장의 ‘권한대행’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희한한 상황은 전대 총학생회장 선거 과정에서 두 선거 캠프 간에 발생한 문제가 법정 싸움으로 번지며 발생했다. 선거에서 당선되어 활동 중이던 전대 총학생회에 대해 법원이 ‘직무정지’를 명했고, 총학생회(장)의 역할을 대신할 ‘권한대행’ 2인을 선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선정된 권한대행이 일반대학원을 대표해서 대학본부와의 각종 논의 테이블에 참여하는 일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박해성

 

 

 

시대 흐름에 따라 학생운동의 내용·형식 변화

10여 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총학생회 무용론’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일견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학원보다 한결 사정이 나은 학부 총학생회조차도 몇몇 대학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기능과 권한이 ‘학생 서비스 2팀’ 수준으로 대폭 축소되었고, 전일제 학생의 비율이 낮은 일반대학원의 경우 대부분 총학생회 자체가 없다. 학부생보다 더 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대학원생은 스스로를 대표할 대의기구를 갖지 못한 셈이다.

총학생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나오는 말이 ‘대학 내 운동권의 퇴조에 따른 현상’이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부정입학 문제를 계기로 촉발된 이화여대 투쟁 사례에서 총학생회 주도가 아니라, 참가자들의 네트워크 형태로 투쟁이 이루어졌음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참가자들은 ‘투쟁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총학생회를 비롯해 ‘외부 세력’과의 연계가 의심되는 단위들의 참여를 배제한 바 있다. 이러한 반응은 기존 ‘운동권’ 총학생회가 보여준 내부적 모순과 한계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작용이라고 하겠다. 이제는 대학본부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는 이른바 ‘강성 총학’이라 하더라도 ‘운동권’의 명칭이나 언어들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학생운동의 내용과 형식도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생운동이 투쟁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최근 몇 년간 교육계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기성 체제와 언어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은 꾸준히 존재했다. 2013년, 대학가를 넘어 중·고등학교까지 퍼졌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운동은 개인의 삶에 매몰된 것처럼 보였던 학생들도 여전히 ‘우리’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2015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때 학생들은 교육행정의 ‘당사자’로서 의견을 제시했다. 2016년과 2017년 초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옴으로써 10대, 20대가 더 이상 ‘정치 무관심층’이 아님을 증명했다. 2018년 ‘미투 운동’ 국면과 ‘강사법을 악용한 대학 구조조정 반대 운동’ ‘총장 직선제 요구’ 등 대학가의 굵직한 사건에서도 학생들은 더 이상 기성세대의 들러리 서기를 거부했다. 대학원생의 노동자성을 주장하며 2017년에 결성된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문제는 ‘총학생회가 운동권이냐, 비(非)운동권이냐’가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학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비해 약자일 수밖에 없는 대학(원)생의 처지에서, 권익을 대변해줄 대의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과거의 ‘운동권’ 총학을 비판하며 학생자치에 관심을 끊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대학가에서 학생 자치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학생 개개인의 권익 보호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학생 자치라는 최소한의 제동장치마저 없다면, 고등교육의 이념은 무시하고 성과와 이윤만을 좇는 대학의 폭주가 가속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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