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bank1960년 1월26일 고향으로 가기 위해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서울역 계단에서 넘어져 3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경의선 얘기할 때 등장했던 이름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프랑스 회사 피브릴(Fives Lile). 피브릴 사는 1896년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따낸 데 이어, 서울과 목포를 연결하는 ‘경목선’ 부설권을 요구해왔어. 이 철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논산평야와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알토란같은 노선이었지. 조선 정부는 피브릴의 요청을 이번에는 뿌리친단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경목선을 부설할 여력이 없었어. 나라가 포기한 경목선 부설권을 따낸 건 서오순이라는 사람이었어. “1904년 독립협회 회원인 이윤용을 사장, 서오순을 전무로 하는 호남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중략) 이들은 철도가 국가의 부강과 독립에 긴요한데도 이미 부설된 경인·경부·경원철도가 외국인의 수중에 있는 문제점을 인식했다. 게다가 물산이 풍부한 호남을 관통하는 철도는 이익이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조선일보〉 2010년 1월2일자).” 여기서 경목선이 ‘호남철도’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 노선은 향후로도 ‘호남선’으로 불리게 돼.

호남철도주식회사는 실제 공사에 들어갔지만 역시 장애물은 일본이었어. ‘국방상 중대한 기능을 하는 철로 건설을 개인에게 불하함은 곤란하다’라는 등 갖은 핑계로 호남철도 건설을 막아섰던 거야. 호남철도를 주도하던 서오순은 “대한제국 독립의 원인은 호남철도에 있다”라는 혈서까지 써가며 저항했어. 태산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나라가 통째로 먹히는 마당에 철도의 권리가 온전할 수 없었지.

일본에게는 호남선을 시급히 건설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어. 한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서 나오는 쌀이었지.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자국의 식량기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 경술국치 후 일본은 호남선 공사에 박차를 가했고, 3년8개월이라는 시차를 두고 대전과 목포 간 철도 노선이 구간별로 개통되지. 그 끝에 1914년 1월11일 전북 정읍과 광주 송정리를 잇는 아홉 번째 철도 구간이 준공되면서 ‘호남선’이라는 이름의 완성된 철도가 역사에 등장한단다.

호남선의 슬픈 역사는 그 이후로도 지속돼. 호남선은 애초에 여객의 수송보다는 쌀 등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된 노선이었어. 일본인들이 만주나 중국으로 갈 때 즐겨 이용하던 경부선·경의선에 비해 시설 투자도 훨씬 미비했고 운행 횟수도 적었다고 해. 즉 일본인들이 경멸을 담아 얘기하는 ‘조센징’들이 주로 타는 기차였다는 얘기지.

경부선이나 경의선에 비해 호남선이 푸대접을 받은 건 운행 초기부터였던 것 같아. “경원선과 호남선은 거의 조선 사람만 타니까 개량도 안 하고 친절히 대해주지도 않는다고 조선 사람들의 철도에 대한 불평이 점점 높아가는 모양인데 (중략) 아무리 지선이라도 경원선과 호남선에 대하여는 학대가 비상하여 똑같은 기차 삯을 내는데 어찌하면 철도 길이 다르냐고 이와 같이 차별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자연히 승객의 마음에 일어난다(〈동아일보〉 1920년 4월19일자).”

전라도 일대에 펼쳐진 호남평야, 나주평야의 곡창지대는 일제의 수탈이 가장 극심하게 자행된 곳이었어. 그 땅뙈기에 식구들 목숨 얹어놓고 살아가던 농민들은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이불 짐 싸들고 타향으로, 만주로 향해야 했어. 호남선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 알 수 없는 목적지에 대한 두려움까지 싣고 달리던 열차란다.

그 역사는 해방이 와도 단절되지 않았어. 산업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소외된 호남 지역 젊은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타지로 갈 수밖에 없었거든.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가 만들고 가수 양희은이 불렀던 ‘서울로 가는 길’의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고향 떠나 서울로 서울로 가야 했던 호남선 열차 속 젊은이들의 심경을 100분의 1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 지 삼년에/ 뒷산에 약초 뿌리 모두 캐어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경부선은 112대, 호남선은 28대 운행

물론 이 노래만 보면 이 청년이 경부선을 타는지 호남선을 타고 올라오는지 알 수 없지만 ‘1970년대부터 전국 광역자치단체의 인구 감소 추이를 보면 가장 인구가 크게 감소한 지역은 전북, 전남이 1, 2위를 차지하고 있음(〈전남일보〉 2018년 8월20일자)’이라는 통계를 보면 어림짐작이 되지 않을까. “가장 값싼 노선이라 의자 하나에 세 사람이 조여 앉아야만 했는데, 서울 와서 물건을 해가는 가난한 보따리장수들이 대부분이고 짐도 많았다(황석영, 〈개밥바라기별〉 중)”라던 호남선 완행열차를 생각해봐도 그렇고 말이다.
호남선은 해방 당시 호남 인구의 3분의 1 내지 절반 가까이를 타지로 실어낸 철도였지. 이 철도가 복선화, 그러니까 일제가 깔았던 호남선 레일 옆에 레일 하나 더 붙이는 데에는 36년 세월이 걸렸어. 호남선 복선화는 2003년 12월에 완성된단다. 그러니 그 열차 사정은 얼마나 ‘폭폭했겠니’. “호남선 열차 예매소에는 암표상들이 들끓고 있었는데 (중략) 근본적인 이유는 호남선 열차가 승객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 경부선은 상·하행을 합쳐 112대가 운행되고 있는데 호남선은 4분의 1도 안 되는 28대에 불과했다(〈한겨레〉 1989년 9월12일자).”

1960년 1월28일은 설이었어. 이틀 전인 1월26일 서울역은 설을 쇠러 고향 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지. 철도청도 대목이었어. 서울에서 밤 10시50분에 떠나는 호남선 열차의 좌석 판매량은 평소의 세 배였어. 입석표도 동날 만큼 표를 팔아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사람들을 태우려면 당연히 기차를 더 연결해야 했지. 덜컹덜컹 차량들을 부산하게 연결하여 완성한 시간은 불과 출발 5분 전.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개찰이 출발 5분 전에 시작됐다는 거야. 4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역무원의 ‘땅’ 신호와 함께 개찰구를 향해 육상 선수처럼 뛰었어.

좌석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맹렬하게 달렸다. 좌석이 있다 한들 뒤늦게 탔다가는 좌석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몇 시간을 두 발로 버티는 고문을 당해야 할 판이었어. 호남선의 혼잡함은 역사적으로 유명했다. 엄마 등에 업힌 갓난아기가 만원 열차 안에서 질식사한 적도 있을 정도였지(〈경향신문〉 1970년 2월6일자).

이 필사적인 경주가 진행되던 계단에서 한 명이 크게 비틀거리더니 허우적거리며 넘어졌어.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악, 악’ 비명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걸려 넘어졌어. 그 위에 또 다른 사람들이 넘어졌고, 사태를 알아차린 이들도 뒤에서 밀어대는 인파의 무게에 결국 그 위에 엎어졌다. 결국 그중 31명은 영원히 고향에 가지 못했지.


호남선의 역사를 흘낏이나마 돌아보다 보니 아빠는 좀 참담한 느낌의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된다. “그 기차는, 그리고 기차에 타는 사람들은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했던 걸까.” 그리고 노래 가사 하나가 또 눈앞에 빗물처럼 흐르는구나. ‘죄도 많은 청춘인가 비 나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비 내리는 호남선’ 가사).’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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