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세상을 보여주고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좋은 작품에는 삶의 기쁨뿐 아니라 슬픔도 담겨 있는 법이다. 그래야만 인생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어린이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에게 이해되어야 하므로, 작가가 사용할 수 있는 연장에 제약이 따른다. 기술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독자가 어릴수록 글쓰기가 어렵다. 덕분에 좋은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긴다. 〈꼬마 너구리 요요〉는 가장 어린 독자를 위한 동화집이다. 어린이 스스로 읽을 수도 있고 어른이 읽어주어도 좋다. 다만 읽어주는 어른은 어느 문장에서 눈물이 차오를지 모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내가 더 잘할게’에서 요요는 길을 잃어 잠시 요요네 집에 머무르는 아기 늑대 후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후우는 너무 어려서 말도 못하고 매사에 새침하지만 요요는 그런 후우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춤·노래, 심지어 먹을 것에도 넘어오지 않던 후우가 따르는 건 요요의 친구 흰곰 포실이다. 요요는 후우랑 손잡고 노는 꿈도 꾸지만, 현실에서 후우가 덥석 안기는 건 포실이다. 심지어 포실이는 후우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도!

문학의 독자가 될 때쯤이면 어린이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최선을 다해도 관계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요요는 가슴이 콕 찔린 것 같고 화가 난다. 그렇다고 후우가 미워지지도 않는다. 그런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겪으면서 어린이는 자란다.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동화에 적혀 있기 때문에 어린이는 동화를 읽는다. “왜 나는 아니야?” ‘다른 애는 좋아하면서.’ 후우가 떠난 뒤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 요요에게 작가는 이런 문장을 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울음은 잦아드는 법이고, 그건 요요도 마찬가지였어요.” 요요는 눈물을 닦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엄마가 해준 따뜻한 감자 수프를 먹고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건 후우의 마음이니까.’ 

〈꼬마 너구리 요요〉
이반디 글
홍그림 그림
창비 펴냄


요요의 마음이 여기까지 오도록, 작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조심스럽게 심었다. 어린이에 대한 존중이 행간에 배어 있다. 깨끗한 문장만큼이나 귀여운 유머도 좋다. ‘새해’에서 요요가 눈앞에 있는 자기 이름도 못 알아보면서 글자를 안다고 우기는 장면이나, 뱀 슈슈가 새해 소원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고백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소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독자로서 ‘이반디 작가가 작품을 좀 많이 써주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요요 이야기는 적어도 열 권은 되는 시리즈로 나왔으면 좋겠다. 어려운 작업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많이 쓰는 것은 잘 쓰는 작가의 의무 아니던가. 

기자명 김소영 (〈어린이책 읽는 법〉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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