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2주
  • 태안·대전·서울 나경희 기자
  • 호수 590
  • 승인 2019.01.07 17: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마음껏 슬퍼할 시간조차 없다.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2주째 태안과 대전, 서울을 오가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기가 잠투정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등에 업혀 들었던 자장가를 기억하며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아들이 본인처럼 순한 아이를 낳아 자신이 듣고 자랐던 자장가를 들려주기를 바랐다.

2018년 9월17일 아들 김용균씨(24)는 난생처음 고향을 떠나 타지로 나가 살았다. 기대했던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김미숙씨(49)는 “그래도 공기업이니까” 마음을 놓았다. 욕심처럼 날마다 통화할 수는 없었다. 경북 구미의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는 어머니는 2조 2교대로 일했고,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는 아들은 4조 2교대로 일했다. “서로 잠자는 때를 피해서 시간을 맞춰봤더니, 사나흘에 한 번씩 통화할 수 있는 날이 돌아왔어요.”

ⓒ시사IN 조남진김미숙씨가 지난 12월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추모행동의 날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용균이가 하지 말라는 일을 했다고?

아들이 첫 출근한 지 석 달이 채 안 된 날, 경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 12월11일 새벽이었다. 그 길로 태안군 보건의료원으로 달려간 부모는 영안실에서 아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회사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어머님, 죄송합니다. 용균이는 착했는데 고집이 세서 하지 말라는 일을 했고, 가지 말라는 곳을 갔습니다.’ 이게 자식 잃은 부모에게 처음 꺼낸 말이었어요.” 옆에 있던 용균씨의 동료들이 항의했다. 어머니는 그때 아들이 피켓을 들고 찍은 사진을 처음 보았다. 피켓에는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쓰여 있었다. ‘엄마 아빠가 자기 억울한 거 풀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 발생 이틀이 지나고서야 태안 화력발전소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흩날리는 분진 때문에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석탄가루 때문에 발은 자꾸 미끄러졌다. 홀로 컨베이어벨트에 고개를 넣고 작업하다 사고가 나면 라인을 멈출 장치(풀코드)는 늘어진 줄에 불과했다. 현장을 다녀온 직후 어머니는 언론에 모자이크 처리 없이 아들 사진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가서 보니 우리가 잘못한 게 없더군요. 당당하게 얼굴을 공개해서 내가 진실하다는 걸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었어요.”

지난 12월17일 어머니 김미숙씨는 청와대 분수대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기 전 청심환을 먹었다. 김씨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쓴 글을 읽어내려 갔다. 아들이 죽은 뒤, 자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일어나서 쓴 글이었다. “우리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진상 규명해주시고, 관계자를 처벌해주십시오. 비록 용균이는 대통령을 못 만났지만 우리 부모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아들의 분향소를 찾은 어머니는 영정사진에 이마를 맞대고 다짐했다. “엄마가 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줄게. 내가 최선을 다해 발 벗고 나설 거야. 약속할게.”

아들이 떠난 지 일주일 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날, 어머니는 광화문광장에 나갔다. 지난 12월19일 아들 용균이 또래의 청년들이 촛불을 들었다. 2년 전 구의역 참사로 숨진 김군의 동료, 특성화고를 졸업하자마자 하청 비정규직 자리를 옮겨 다닌 청년, 냄새 난다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던 음식 배달원 등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김씨는 그들을 한 명씩 안아주었다. “그 아이들 상처도 크더라고요. 저도 그 아픔을 헤아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사IN 조남진김미숙씨(왼쪽)가 아들 또래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안아주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의 조언 ‘큰 힘’

추모제가 끝난 뒤 어머니의 발길은 세월호 분향소로 이어졌다. “사고가 난 다음 날 세월호 참사 유가족 분들이 조문을 오셨어요. 제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그분들이 먼저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어떻게 견디면 되는지, 자신은 어떻게 견뎌왔는지를요.” 고 오영석군의 어머니 권미화씨는 김미숙씨에게 아이 물건을 그대로 두고, 자기 전에는 ‘잘 자라’ 인사도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항상 사진을 지니고 다니면서 아이가 변함없이 곁에 있는 것처럼 지내라고 했다. “눈앞이 깜깜했는데, 나도 그렇게 하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년 전 제주도에서 생수 제조업체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압착기에 끼어 숨진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도 수시로 용균씨 부모의 안부를 살폈다.

지난 12월20일 각종 노동재해 및 안전사고 피해 가족이 국회 앞에 모여 기자회견을 했다.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를 비롯해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2005년 뇌종양 판정을 받은 한혜경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씨,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다 급성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세상을 떠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2015년 삼성전자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시력을 잃은 김영신씨, 2017년 남대서양에서 실종된 스텔라데이지호 선원 허재용씨의 누나 허경주씨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미숙씨는 ‘세상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기에 노란색 세월호 리본과 주황색 스텔라데이지호 리본을 달았다.

김미숙씨는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대전지방고용노동청으로 향했다. 무엇보다 여전히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용균이 동료들이 눈에 밟혔다. 어머니는 사고가 난 태안 화력발전소 9~10호기뿐만 아니라 1~8호기도 모두 작업을 멈추고 안전대책을 보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컨베이어벨트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에 멈출 이유가 없다’는 노동청의 답변이 돌아왔다. 또한 특별근로감독을 할 때 유가족을 포함해 현장 지식이 있는 상급 노조(민주노총 지역본부와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을 참여시켜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참여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루 전 이명로 대전지방고용노동청장과의 면담에서 확답을 듣지 못한 태안화력시민대책위원회가 재차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청 건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한 상황이었다. 태안화력시민대책위원회는 유가족이 권한을 위임한 단체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에 도착하니, 정문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어머니는 셔터를 흔들며 소리쳤다. “공공기관에서 대낮에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오고 가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노동청 관계자가 나와 ‘쪽문으로 들어가시면 된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거절했다. “저도 국민입니다. 죄지은 사람처럼 몰래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문 열어주세요.” 결국 셔터는 올라갔지만, 이후 3시간 가까이 이어진 면담은 아무런 진척 없이 끝났다.

ⓒ시사IN 신선영지난 12월18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김용균씨의 분향소에 헌화했다. 이들은 컵라면과 과자를 올렸다.
“내가 용균이다. 청와대 가는 길 막지 말라”

촛불을 들고 기다리던 시민과 노동자들이 노동청을 나오는 어머니를 응원했다. 김미숙씨는 함께해주는 시민단체가 ‘용균이 다음으로 든든한 힘’이라고 했다. “그분들 덕분에 제가 싸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실 옛날에는 이런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만날 싸우는 모습만 보여주고 왜 싸우는지는 안 보여줬으니까요. 직접 겪고 나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힘 있는 사람들 마음대로 나라가 흘러갈 것 같더라고요. 어둠 속에서 함께 싸워주는 사람들이 정말 고마워요.”

지난 12월22일, 서울 광화문에서 첫 번째 범국민 추모제가 열렸다. 어머니 김미숙씨가 연단에 섰다. “용균이가 아기 때 불러줬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노래 제목은 잘 모르겠고, ‘잘 자라 잘 자라 우리 아가야’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반주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아가야, 꽃같이~ 예쁜 우리 아가야, 귀여운~ 너 잠 잘 적에, 활짝활짝 나비 춤춘다….” 어머니는 그때를 떠올리며 “내가 노래를 잘 못 부른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정말 좋은 노래거든요. 우리 아들 키울 때 이렇게 예쁘게 키웠다고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싶었어요. 얘 낳고 키우면서 노래 부르고 했던 기억이 너무 좋아요.”

자장가를 부르고 내려온 어머니는 청와대를 향해 걸었다. 행렬은 정부서울청사 앞 사거리에서 멈췄다.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든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시민들은 ‘경찰이 철수하지 않으면 행진할 수 없다’고 맞섰다. 도로 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 김씨는 행진이 다시 시작되자 취재진을 향해 ‘내가 김용균이다’라고 쓰인 검은 리본을 들어 보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어머니는 그 검은 리본을 청와대 사랑채 앞 가로등에 묶어놓고 왔다.

ⓒ시사IN 이명익‘비정규직 100인 대표단’과 시민들이 지난 12월21일 ‘1100만 비정규직 촛불 행진’을 열었다.
주말이 지난 12월24일, 김미숙씨는 빈소가 마련된 태안에서 다시 서울을 찾았다. 이번에는 여의도 국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또 청심환을 먹었다. 오전 10시부터 열리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위원회(환노위 소위)를 앞두고 어머니 김씨는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당 대표실과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실을 차례로 돌며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의 통과를 부탁했다. 개정안에는 노동자가 위험을 느낄 때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와 안전 조치를 위반해 노동자가 숨질 경우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도금처럼 위험한 작업은 하청이 금지된다. 어머니 김씨는 각 당 대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이가 죽으면서 저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일이 있어요. 다른 부모들이 제 아픔을 겪지 않게 해주십시오.”


회의는 자꾸 길어졌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국회의원들에게 김미숙씨는 “용균이 엄마입니다.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저녁 8시, 환노위 소위는 ‘하루 정도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 사흘 뒤인 12월27일, 전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날 복도에서 하루 종일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 김씨는 “우리 아들딸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비록 용균이는 (이 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지만, 아들에게 고개를 들 수 있는 면목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했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