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누구 탓에 왔나
  • 이종태 기자
  • 호수 588
  • 승인 2018.12.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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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을 운영하는 A씨는 연간 매출액이 평균 10억원쯤 된다. 가끔 2억~3억원의 순익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는 2억원 정도의 적자. 인테리어를 바꾸고 크래프트 맥주 설비도 매입했으며 종업원까지 추가 고용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2억원 정도 빚을 졌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더 벌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옆 가게가 부도를 낸 뒤부터 채권자들이 혈안이 되어 빚 독촉에 나섰다. 동네 채권자 대표라는 B씨는 빚 갚을 돈을 빌려줄 테니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가게 운영권도 넘기라고 했다. 새파래져서 돈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A씨에게, 홉(맥주 원료) 공급업자이며 알부자인 C씨가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선친 때부터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A씨가 망하면 C씨도 홉 대금을 못 받게 된다.

A씨가 허겁지겁 달려가서 만난 C씨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 멍든 자국이 선명하고 절룩거리며 겨우 걸었다. A씨가 돈 얘기를 꺼내자 C씨가 말했다. “B씨가 빌려주지 말래.”

ⓒ시사IN 양한모

결국 A씨는 빚 갚을 돈을 빌리는 대신 B씨에게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가게 운영권까지 넘겼다. B씨는 종업원을 해고하고 메뉴를 바꾸면서 A씨를 윽박질렀다. “이 기회에 너의 방만하고 건방지고 돼먹지 않은 사고방식을 확 뜯어고쳐줄 테다.”

A씨는 불과 3~4년 뒤에 B씨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게 된다. 원래 근면한 사업가였고, 2억원의 투자로 준비한 크래프트 맥주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A씨 부도의 날’은 누구 때문인가? 그가 빚까지 지며 투자한 것이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덕분에 빠른 채무 청산이 가능했으므로 매우 생산적인 투자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B씨의 C씨에 대한 압박’을 직접적 원인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을까? 최근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국가부도 원인을 덮어씌웠다는 비난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왜 우리 잘못을 남에게 돌리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자체의 기조를 외인론(外因論: IMF와 미국이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국내적 원인(재벌의 방만한 투자와 무능한 관료)도 크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을 남에게 돌리면 안 되겠지만, 남이 우리에게 한 일을 ‘무조건 내 탓’이라고 우격다짐하는 것도 곤란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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