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감사원 전 직원 현준희씨(왼쪽)의 양심선언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문옥 전 감사관이 현씨를 만나 축하하고 있다.
“이사람아, 12년간 고생 많았네. 요즘 감사원 후배들도 좀 달라지는 것 같더구먼.”(이문옥 전 감사관)
“형님을 바라보고 버텨왔어요. 양심선언자를 둘씩이나 배출한 기관은 감사원밖에 없을걸요. 허허.”(현준희 전 감사원 주사)

한낮 기온이 영하 5도에 머무르던 11월18일, 서울 계동에 자리한, 전 감사원 주사 현준희씨가 운영하는 ‘서울게스트하우스’ 안마당에서 감사원 전직 내부고발자 두 사람이 언 손을 마주 잡았다. 1996년 효산콘도 비리 감사가 외압에 의해 중단됐다는 양심선언으로 감사원에서 파면된 현준희씨의 12년에 걸친 법정 싸움 종료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1991년 재벌 비업무용 토지 보유실태 감사가 삼성그룹의 로비로 중단됐다고 양심선언을 했던 이문옥 전 감사관이 선배 처지에서 현준희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대법원은 감사원 간부들이 양심선언한 현준희씨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 고소 사건에 대해 12년 만인 11월13일 현씨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재판부(주심 전수안 대법관)는 판결문을 통해 “현씨의 양심선언은 헌법상 독립적·중립적 기관인 감사원의 기능을 공정하게 수행하도록 촉구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보기에 충분하다”라며 무죄를 확정했다.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공익제보자모임)’이 주최한 이날 축하 자리에는 1992년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전 중위, 역시 같은 해 관권 부정선거를 고발한 한준수 전 연기군수, 적십자사의 오염된 혈액 실태를 고발한 김용환씨 등이 함께했다. 공익제보자모임 김용환 대표는 현준희씨의 무죄 확정판결 축사를 통해 “우리 공익 제보자들은 하나같이 파면당한 뒤 감옥에 갇혔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의 양심선언이 사회의 부정 비리를 정화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12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패소한 감사원은 책임 있는 후속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고발은 짧고 고통은 길었다”

승소 소감을 묻자 현준희씨는 “이런 상식적이고 간단한 사건이 12년이나 끌 줄 상상도 못했다. 이겼으면 좋아해야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안 든다. 감사원에서 누구 하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현씨가 말하는 ‘상식적이고 간단한 사건’이란 무엇일까. 1978년 100대1의 경쟁을 뚫고 감사원에 채용된 현씨는 ‘그 일’이 있기까지 15년이 넘도록 소시민적 삶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감사원 공무원을 천직으로 여기며 정년퇴직하는 것이 꿈이었다. 현씨가 감사원에서 막 5급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기에 운명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찾아왔다. ‘그 일’은 1995년 봄, 감사원 4국1과에서 감사담당관으로 근무하던 현준희 주사에게 날아든 제보에서 비롯됐다. 효산그룹이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경기도 남양주에 불법 건축물 인가를 받아내고 있다는 요지의 제보였다.

현준희 주사가 조용히 감사에 들어가니 사건은 심상찮았다. 남양주 지역에서 서울리조트 스키장을 운영하던 효산그룹이 수도권정비법에 묶여 있는 곳이라 콘도를 못 짓게 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소통령으로까지 불리던 김현철 사단을 이용해 건설교통부 등 주무 기관을 움직여 건축 인가를 받아낸 정황을 포착했다. 현씨는 이 사건이야말로 대단히 죄질이 나쁜 권력형 비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감사 도중 문제가 생겼다. 난데없이 상부에서 감사 중단 지시가 떨어진 것. 현씨의 직속상관이던 감사원 4국장이 이 사건 감사를 5국으로 넘기라고 지시했다. 처음에는 현씨도 상부 지시에 따라 사건을 5국으로 넘겼다. 대신 그동안 내사한 핵심 비리 자료를 12쪽에 달하는 첨부자료로 묶어 5국2과에 건네줬다. 그러나 5국2과에서는 중대 사안인 이 사건을 참고 사안 정도의 최하위 등급으로 분류해 감사를 중단해버렸다.

이렇게 되자 현준희 주사는 상급자들에게 ‘엄중한 권력형 비리 사건이니 감사원장에게 보고해달라’고 서면 건의서를 여러 차례 제출했다. 수차례 결재판을 들고 국장실을 들락거렸지만 6급 감사담당관인 현씨가 소신을 펼 여지는 없었다. 그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뜨악하다’는 간부들의 시선과 ‘하극상’ 운운하는 위협이었다.

상부에서 감사 건의를 거듭 묵살하자 자괴감에 빠진 그에게 ‘이대로 넘어갈 순 없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만든 계기가 생겼다. 현씨가 감사 중단 지시를 받고 몇 달이 지난 1996년 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집사이자 청와대 부속실장이던 장학로씨가 효산그룹으로부터 6000만원의 검은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것이다. 효산콘도 권력형 비리 의혹과 연관지어 이 사건을 파악하던 현씨는 비상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현씨는 양심선언을 놓고 번민에 빠졌다. 몇 년 전 파면당하고 감옥에 다녀와 고생하던 이문옥 감사관의 얼굴도 스쳤다. 양심선언을 하면 감옥 가고 죽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함구하면 달콤한 대가가 오겠지만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온 공무원관 앞에 평생 비겁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괴감이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고민으로 몸부림치던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던 현씨의 아내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하니 옳다고 여기는 길을 택하라”고 격려해줬다. 현씨는 마침내 1996년 4월8일, 감사 서류 보따리를 싸들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여기에서 “권력형 비리 의혹이 있는 효산콘도 비리사건에 대한 감사를 상부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중단시켰다”라는 요지로 양심선언을 했다.

현준희씨가 양심선언을 하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양심선언이 있은 지 한 달도 안 돼 효산그룹 장장손 회장과 제일은행 이철수 행장이 검찰에 구속됐다. 효산의 배후로 김영삼 대통령의 중학 동창이던 김경배씨가 드러났다. 그는 효산 고문으로 들어가 당시 시가 5억원대 단독주택을 받고 사세 팽창을 도와준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효산 비리 뒤에는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김영삼 정부의 권력층이 있었던 셈이다. 제일은행, 주택은행, 고려증권 등이 권력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불법으로 뭉칫돈을 대출해줬다. 금융감독기관은 불법을 발각하고도 눈감아줬다. 건설교통부와 경기도, 남양주시 등에서도 편법으로 콘도 건설 인가를 내줬고, 감사원 현준희 주사가 감사에 착수하자 상부에서 중단시켰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측근이던 박태중씨가 효산콘도 분양권 24억원어치를 소유한 사실이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시사IN 안희태현준희씨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현씨 집에 모인 공익 제보자들. 앞줄 오른쪽부터 이지문 중위, 한준수 전 연기군수, 현준희씨, 김용환 대표.
하지만 현준희씨에게 상은커녕 철저한 보복 조처가 뒤따랐다. ‘도둑이야!’라고 외친 그의 목청은 가공할 만한 공권력의 보복 앞에 외마디 비명으로 전락했다. 감사원은 현씨를 파면한 것도 모자라 검찰에 고발했다. 현씨는 두 달간 감옥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의 공익 제보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16대 국회는 현준희씨의 양심선언을 입법 제안 골자로 넣어 부패방지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국민도 정치권도 그동안 현씨가 가져온 사회 투명성 제고라는 열매만 챙겼지, 실제 그가 빠졌던 고통의 나락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씨는 파면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연금도 절반밖에 못 받은 채 노모를 모시고 두 자녀를 기르며 감사원을 상대로 12년간 신산한 법정투쟁을 벌여왔다. 다단계 판매, 휴대전화 영업사원, 영화 단역배우 등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은 안 해본 것 없이 전전했다. 그나마 민변과 참여연대 소속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해주어 큰 힘이 됐다. 2000년에는 서울 북촌에 외국인 상대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서울시가 북촌전통마을 육성사업으로 현씨에게 한옥을 임대해준 것이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한 번도 감사원 직원의 본분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현씨는 결국 이번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로 명예를 회복해 감사원으로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무죄를 받았다고 해서 현준희씨가 직면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감사원이 전향적 조처를 취하지 않는 한 현씨 앞에는 파면 무효 소송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현준희씨는 “감사원이 양심 있는 국가기관이라면 나에게 사과하고 파면 조처를 스스로 철회해주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앓던 이를 뽑겠다’는 태도로 현준희씨를 고소한 감사원은 12년 만에 패소한 소감을 묻자 “할 말 없다”라고 답변했다. 감사원 홍보담당관실 관계자는 “현준희씨 판결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않고 있으며 공식 입장도 없다. 무죄판결이 났다고 감사원이 상응하는 조처를 당장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김황식 감사원장이 현씨 복직시켜야

그러나 이같은 감사원의 태도는 이율배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 시절 오정희 감사원 사무총장과 공보 관계자들은 이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에게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법적으로 현준희씨가 무죄라면 상응하는 화해와 구제 조처를 하겠지만 이미 대법원조차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지 않았느냐.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파기환송심에서 서울고법은 다시 무죄판결을 내렸고, 이번에 대법원이 최종으로 원심을 확정했다. 그렇다면 감사원은 당연히 무죄를 받은 현준희씨의 복직과 화해 조처를 전향적으로 취해야 마땅하다.

감사원 6급 이하 직원으로 구성된 ‘실무자협의회’는 지난 10월20일 내부통신망을 통해 “감사원이 권력에 휘둘린 과거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독립성과 중립성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김황식 감사원장은 최근 쌀 직불금 파동 과정에서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국민에게 감사원이 신뢰받는 조처를 해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국민의 신뢰란 멀리 있지 않다. 대법원이 판시한 대로 현씨는 감사원 본연의 공직 기강 감시라는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외압을 고발하는 정당한 행위로 박해를 받았다. 그렇다면 김황식 감사원장으로서는 현준희씨를 복직시키고 감사 현장에 투입하는 것만이 그나마 무너진 감사원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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