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합일(九合一)’ 선거로 불리는 타이완 지방선거는 시장 및 시의원 등 9개 분야 공직자를 한 번에 선출하는 대형 정치 이벤트다(지역별로 3~5개 분야 공직자만 뽑기도 한다). 유권자 약 1800만명이 모두 1만1130명에 달하는 공직자를 선출한다. 같은 날 탈원전 폐지 여부, 동성혼 합법화를 포함해 모두 10개 안건에 대한 국민투표도 동시 실시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1월24일 선거 전부터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투표안이 너무 많고 또 복잡하다. 아예 다 찬성이나 반대를 찍어야겠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지난해 말 민진당은 “국민투표 기준이 너무 높아서 통과될 수 있는 제안이 거의 없다”라며 국민투표법 개정을 추진했다. 개정 전에 국민투표를 제안하려면 약 9만명(총 유권자의 1000분의 5)을 모아야 했지만, 개정 후에는 약 1800명(유권자 수의 1만 분의 1)만 충족시키면 된다.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한 서명 기준도 낮아졌다. 전에는 약 90만명의 서명이 필요했지만, 법 개정으로 약 28만명의 서명이면 충분하다. 투표 통과 기준도 대폭 완화됐다. 개정 전에는 투표율 과반과 유효 ‘동의’표 과반 확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의표가 반대표보다 많기만 하면(단순 다수) 국민투표에 부쳐진 안건이 통과된다.

ⓒ타이완 중앙통신사 홈페이지11월23일 한궈위 가오슝 시장 후보의 지지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대머리인 한궈위 후보를 지지하는 뜻으로 머리를 삭발했다.

그 결과가 탈원전 부결과 동성결혼 불허였다. 민진당 정부 스스로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다. 이로써 수년간 국제사회가 타이완에게 부여한 진보 이미지가 반전됐다. 타이완 최고법원이 ‘동성결혼 불허는 위헌’이라는 불가역적 판결을 이미 내렸기 때문에, 이번 국민투표가 그 자체를 뒤집을 수는 없다. 하지만 민법 개정 대신 특별법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우회해야 함으로써 동성결혼 합법화 작업 시간이 길어졌다고 볼 수 있다. 원전 가동 연장안 역시 가결됐지만 달라질 건 없다. ‘2025년 원전 제로’는 애초 설계수명에 따라 멈출 수밖에 없다. 차이잉원 총통 역시 “탈원전 정책은 변화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국민투표안 득표 결과를 보면 투표율은 약 55%, 통과된 제안의 찬성률은 50~ 75%였다. 하지만 총 유권자 수를 분모로 찬성률을 계산해보면 31~43% 정도다. 국민투표의 ‘대표성’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이를테면 국민투표안 10개 중 하나였던 ‘2020년 도쿄 올림픽에 타이완 국호로 참여하자’라는 안건 역시 부결됐다(중국은 타이완을 중국의 일부로 여겨, 타이완은 그동안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국제대회에 참여해왔다). 한국 언론은 이를 “중국과 타이완이 더 가까워졌다”라고 했지만 이는 과대 해석일 수 있다. 타이완 독립을 지지하는 일부 유권자들마저도 ‘타이완’ 국호로 올림픽 참여를 강행했다가 벌어질 중국 측의 압력을 두려워한다.

ⓒAFP PHOTO11월24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차이잉원 총통(아래)이 민진당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광주에서 자유한국당 후보가 당선된 꼴

선거 이후 타이완은 이전의 타이완이 아니다. 집권당인 민진당은 대참패했다. 타이완 내 22개 지자체 중 13개 지역을 차지했던 민진당은 이번 지방선거 이후 6개 지역을 지키는 데 그쳤다. 가오슝, 신베이, 타이중 같은 핵심 지역을 모두 잃었다. 차이잉원 총통은 민진당 주석직에서 사퇴하며 선거 참패에 책임을 졌다.

특히 민진당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타이완 제2도시 가오슝에서 국민당 후보가 20년 만에 승리했다. 이 결과가 던지는 충격은 컸다. 타이완의 가오슝은 한국의 광주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도시로, 가오슝의 국민당 당선은 광주에서 자유한국당 후보가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궈위 가오슝 시장 당선자는 타이베이 농산품운수판매공사 사장 출신으로 가오슝을 부자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대회전 관람차형 섹스모텔을 만들겠다” 따위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제시했다.

이 같은 ‘오락성’에 상업 언론이 결합하며 한궈위 후보에 대한 보도 비중도 높아졌다. 친중 성향의 보도 채널은 1시간 분량의 뉴스 47꼭지 중 35개를 한궈위 후보와 관련한 뉴스로 채우기도 했다. 후보나 정책에 대한 검증이 아닌 흥미 위주의 신변잡기 보도가 주를 이뤘다. 이 보도 채널 주관자는 “한궈위 후보가 방송에서 나오면 시청률이 눈이 띄게 올랐다. 이 때문에 우리도 한 후보의 보도 영상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민진당이 참패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상황이다. 수치로만 보면 호황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GDP는 8.4%포인트 올라 2010년 이래 최고치이고, 2018년 상반기 실업률은 3.66%로 지난 18년 동안 최저치다. 문제는 근로소득이다. 타이완과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약 2100시간인데, 1인당 GDP는 한국이 타이완보다 약 20% 앞선다.

차이잉원 총통은 취임 후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을 확보하는 동시에 유연하게 추가근무를 통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례일휴(一例一休)’라는 근무제도를 추진했다. 주 5일 근무 후 나머지 2일 중 하루는 의무 휴일로 정하고, 나머지 하루는 사용자가 노동자와 합의하고 수당을 지급하면 추가근무를 요청할 수 있는 제도다. 의도는 좋지만 업종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고 보완책도 부족하다. 결국 혼란을 초래하고 노사 양측의 불만이 쏟아진 끝에 실행 1년 만인 올해 초 개정됐다.

또 한 가지 쟁점은 군인, 공무원 그리고 교직원(군공교) 연금 개혁이다. 원래 군공교는 정년퇴직 후 6만3430타이완 달러(약 230만원) 이상의 연금뿐 아니라 은행에서도 특혜 이자율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해 대졸자 초임은 약 3만3095타이완 달러(약 120만원)에 그쳐 임금 격차가 심화되고 연금제도도 파산 위기에 처했다. 세대 간 불평등과 재정을 정비하기 위해 민진당이 주도한 입법원(타이완 국회)은 군공교 퇴직금을 삭감하고 특혜 이자율도 취소했다. 국민들은 호평했지만, 군공교의 심각한 반발이 일었다. 국민당 독재 시절 사회에 진출한 이들은 대부분 국민당의 핵심 지지자다.

노동 개혁에 대한 불만과 연금 개혁에 대한 분노가 팽배했으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단체들이 국민당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농협, 수협 등 지방의 전통 조직부터 언론과 SNS까지, 가용할 수 있는 여러 통로로 민진당을 두들겼다.

물론 주요 지지층인 2030 세대가 민진당에 갖는 실망이 매우 큰 점도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2년 전 대선 당시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던 차이잉원 총통은 취임 후 관련 이슈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탈원전이나 국제대회 참가 시 국명 변경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음으로써 핵심 지지층의 이탈을 가속화했다. 고작 4~5개월 전만 해도 민진당 정권과 소속 후보들은 지방선거 결과를 낙관했다. 최소한 주요 근거지는 잃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개혁은 섬세하게 다루지 않으면 잔인한 ‘현실’을 마주할 뿐이다.

기자명 타이완·양첸하오 (타이완 프리랜서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