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현 제공작곡가 겸 가수 박광현은 ‘떠나야 할 땐’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등
10년간 150여 곡을 만들었다.

허클베리핀 이기용이 만난 뮤지션 ㉓ 박광현

한국 대중음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박광현은 당대 주류 음악계의 한가운데 서 있던 개성이 뚜렷한 작곡가 겸 가수였다. 그가 작곡하고 이승철이 불러 히트한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등 여러 노래는 분명 그 시대의 새로운 멜로디였고 색다른 감성이었다. 록밴드 ‘부활’에서 탈퇴해 불안한 마음으로 이제 막 새 출발을 준비하던 이승철에게 박광현이 만든 음악은 성공으로 가는 확실한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거리 가판대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뭔가 어색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것은 그의 음악이 다른 히트곡과는 다른 뭔가 이질적인 감성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광현의 솔로 앨범에 수록된 ‘풍경화 속의 거리’나 이승철이 부른 ‘떠나야 할 땐’ 같은 곡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아름답고도 쓸쓸한 서정으로 그 깊이에서 남달랐다. 특히 ‘떠나야 할 땐’에서 그가 보여준 광활한 풍경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그전까지 전혀 느낄 수 없는 감성이었다. 박광현의 작법은 동시대의 다른 음악과는 확실히 달랐고,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가 그의 음악을 특별하게 기억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약 10년간 150여 곡을 만들며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1998년 발표한 5집 앨범을 끝으로, 20년간 단 한 곡도 발표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날 무척 오랜만의 단독 공연을 마친 그를 서울 성북동에서 만났다.
 

 


이기용:아주 오랜만에 공연을 해서 팬들이 무척 기뻐했을 것 같다. 공연의 세트 리스트가 궁금하다.

박광현:‘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 ‘풍경화 속의 거리’ ‘잠도 오지 않는 밤에’ ‘함께’ ‘재회’ 등 내 노래 6곡과 재즈, 팝 등의 곡을 포함해서 1시간 반가량 했다.

이기용: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반까지 독보적인 아티스트였는데 갑자기 활동을 중단했다.

박광현:맞다. 활동을 오래 안 하다 보니 오랜 팬들 중에도 나를 언더그라운드 음악인으로 아는 분이 있을 지경이다(웃음). 사실 나는 주류 상업음악 영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래서 상업적으로 히트할 만한 음악을 내놓지 못하는 한 쉽게 음악을 발표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거기에 건강 문제 등 이러저러한 일이 겹치다 보니 지난 20년 동안 새로운 음악을 계속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더 늦기 전에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공연도 하고 내년부터 신곡도 발표할 계획이다.

이기용:반가운 소식이다. 1980년대 후반에 혜성처럼 등장했는데, 어떻게 음악계에 데뷔하게 되었나?

박광현:서울대 음대에 들어간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돈 벌 목적으로 카페에서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몇 달 사이에 만든 노래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잠도 오지 않는 밤에’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 같은 곡이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니 카세트 데크
두 대를 구해서 한쪽 데크에 기타와 보컬을 녹음하고, 그걸 틀어놓은 뒤 다른 데크로 기타 솔로나 코러스를 추가 녹음하는 식으로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다. 그렇게 15곡을 데모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여러 음반사에 들고 다녔다. 처음 내 노래를 사겠다고 한 곳이 당시 밴드 ‘부활’에서 나와 솔로 준비 중이던 가수 이승철의 기획사였다. 그래서 그 회사와 계약하고 음악 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이기용: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화성학을 배운 것이 대중음악 작곡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

박광현:화성학은 어찌 보면 이론이자 학문이다. 그래서 이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거지 화성법이 내가 작곡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클래식이든 팝이든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나 스스로 코드나 구성을 연구하고 익힌 게 작곡에 더 영향이 컸다. 작곡을 시작한 초창기에는 음악을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지금처럼 음악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음악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게 구한 귀한 음반을 애지중지하며 듣고 또 들으며 연구했다.

이기용:본인이 직접 가사도 쓰지만 ‘떠나야 할 땐’ ‘풍경화 속의 거리’ ‘함께’ 같은 곡에선 도윤경씨가 작사에 참여했는데, 가사와 음악의 조화가 대단히 아름답다. 두 사람은 어떻게 같이 작업하게 됐나?

박광현:도윤경씨는 내게 자주 팬레터를 보내던 팬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팬레터에 자기가 쓴 가사를 동봉했다. 무심히 봤는데 그야말로 시 같았다. 그 가사가 마음에 들었고 내 감성에 참 잘 맞았다. ‘그대가 나에게’ ‘풍경화 속의 거리’ ‘함께’ 같은 노래는 그의 가사를 앞에 놓고 기타를 치다 그 자리에서 완성되었다. 그만큼 나와 잘 맞았다.

이기용:기타 얘기를 듣고 싶다. 처음 기타를 잡은 건 언제인가?

박광현: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누나의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주신 걸 내가 받아서 처음 치게 됐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 전기기타를 사서 바로 밴드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딥퍼플이나 퀸 등 밴드의 유명 곡을 카피했다. 그때 드럼을 쳤던 친구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마도 우리가 전국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록 밴드였을 것이다. 그렇게 열네 살에 기타를 치기 시작해서 쉰네 살인 지금도 기타를 치며 곡을 쓴다. 지금껏 40년을 해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기타를 쳐야 하지 않겠나? 내게 기타는 목소리만큼이나 가까이 와 있는 악기이다.

이기용:아들 셋이 모두 음악을 한다고 들었다. 그들에게 음악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나?

박광현:음악을 잘 이해하고 잘하고 싶으면 그저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라고 얘기한다. 아들 세대는 우리와 달라서 포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고 음악도 손으로 직접 연주하는 악기가 아닌 컴퓨터만으로 만드는 세대이다.
큰아들은 상업 작곡가로 활동하며 아이돌 등의 음악을 만들고 있는데 이제는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 ‘아빠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라 할 때 말 들을 걸 그랬어요’라고 한다(웃음).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그 자체가 사실 완벽한 음악적 퍼포먼스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음악의 본질, 구조, 뼈대, 멜로디 등을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작업을 많이 한 사람이 음악에 대한 이해가 높으니까 그들이 더 잘할 수밖에 없는 거다. 다른 게 없다. 음악을 어떻게 가르치겠나. 그냥 많이 쳐보고 불러보며 좋은 음악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몸으로 익힐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광현은 외모에서부터 아티스트의 기운이 대단했다. 20년이나 음악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예인의 풍모가 넘쳐났다. 한때 대중음악의 가장 중심에 자리했던 작곡가 겸 가수. 그가 오랜 세월을 돌아 이제 다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려 한다. 천생 뮤지션인 그가 그간 얼마나 음악을 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좋은 음악을 내놓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을 선택했다. 그 시간이 20년이다. 그의 새로운 음악을 기다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자명 이기용 (밴드 허클베리핀 리더)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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