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2010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 같은 함정에서 근무하던 B소령은 A중위가 부하이고 성소수자라는 점을 빌미로 “남자 맛을 알려주겠다”라며 위력을 사용해 수차례 성폭행 및 강간을 했다. 이 일로 A중위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중절수술까지 해야 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A중위의 상관이던 C중령은 중절수술을 위한 휴가를 받으러 어쩔 수 없이 사건의 경위를 밝힌 그녀가 수술을 받고 돌아오자 ‘위로한다’는 구실로 자기 숙소로 유인한 뒤 강간했다. 결국 A중위는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고, 2016년에는 근무 이탈하여 징계와 전출 명령을 받게 되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피해자가 근무하던 함정은 120~130명이 타는 곳이었으나 여군은 단 두 명이었다. 그나마도 선배 여군은 그해 5월 말 전역하여 여군이 A중위 한 명이 되었고, 9월 말 처음으로 성추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군대와 함정이라는 폐쇄된 구조에서 단 한 명의 여군이 성폭력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지위나 힘에서 절대 우위에 있는 남성 상관이 지속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다는 점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1심 재판부가 B소령과 C중령에게 각각 징역 10년과 8년을 선고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1심 결과를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진술이 피의자의 진술에 비해 신빙성이 부족하다”라는 게 이유였다. 성폭행 사건 때마다 등장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바로 그 이유였다.
이 사건은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피해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셈이다. 우리 사회에는 위력과 힘을 사용해 끔찍한 (성)폭력을 저지른 죄보다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 죄가 더 크다고 판단하는 사례만 켜켜이 쌓이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8월14일, 부하 여성 직원에게 기습적인 강제추행 5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등의 중범죄를 저지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무죄로 풀려나는 걸 보았다. 그때도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사용하지 않은 ‘죄’를 물었다. 거부 의사를 밝히거나 저항하지 않고 무얼 했냐는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위력과 힘 앞에서 얼마나 거부하고 저항해야 피해자는 무죄일 수 있을까?
법은 ‘강간 시스템’의 공모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A중위는 평소 군인으로서 자긍심이 높았다고 한다. 그녀가 6년이나 이 끔찍한 사건을 밝히지 않은 것도 ‘자랑스러운 해군 장교’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을 것이라는 신뢰가 없었기에 밝히기를 꺼렸다. 즉 이번 판결은 자랑스러운 해군 장교가 되겠다는 어느 군인의 당연하고도 옳은 희망을 짓밟았음은 물론 군대 스스로 기강과 명예를 훼손했다. 그리고 법은 유죄라 인정한 사건을 무죄로 뒤집으며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는 이 사회가 여성이나 성소수자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A중위는 상고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11월29일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항소심 첫 번째 공판이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법과 제도가 가해자의 대변자이자 ‘강간 시스템’의 공모자라는 오명을 벗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곳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끈질기게 지켜볼 것이다. 안희정 재판도, B소령과 C중령 재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왜 성폭행 피해자들은 신고하지 않을까?
왜 성폭행 피해자들은 신고하지 않을까?
정회엽 (원더박스 기획팀장)
‘썸을 타던’ A와 B는 밀폐된 공간에서 영화를 본다. 둘은 어느 순간 애무를 시작하지만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았던 A가 “이제 그만하고 영화나 보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B는 멈추...
-
강간 문화를 고발하다 [독서일기]
강간 문화를 고발하다 [독서일기]
장정일 (소설가)
수전 브라운밀러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는 ‘뒤늦게 온 고전’이다. 1975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니 무려 43년 만에 번역본이 나온 셈이다. 제목만 갖...
-
마구잡이 성추행이 ‘예술’이었다고?
마구잡이 성추행이 ‘예술’이었다고?
이상원 기자
4월1일 열린 한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 ‘봄이 온다’가 뒷이야기를 여럿 낳았다. 한국 예술인의 평양 공연은 13년 만이다. 북측 리설주·현송월씨 등은 특히 가수 조용필에게 ‘팬심’...
-
‘안희정 재판’을 비판하는 세 가지 이유
‘안희정 재판’을 비판하는 세 가지 이유
장일호 기자
“피고인은 무죄.” 8월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조병구 부장판사)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제기된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등 10개의 공소사실(기습적으로 이...
-
열네 살 소년이 동급생에게 따귀 맞은 이유
열네 살 소년이 동급생에게 따귀 맞은 이유
김현 (시인)
한 마을 도서관에 특강을 다녀왔다. ‘부모와 아이를 위한 글쓰기’가 주제였는데, 여느 때처럼 가정과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간증하는’ 자리가 되었다.초등학생 시절...
-
드라마 속 여성, 여러분 보기에 어떤가요?
드라마 속 여성, 여러분 보기에 어떤가요?
오수경 (자유기고가)
증강현실 게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도시 곳곳에 출몰하는 적들과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칼이나 총을 들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속성 때문인지 그곳은...
-
버닝썬이 쏘아올린 ‘큰 공’
버닝썬이 쏘아올린 ‘큰 공’
오수경 (자유기고가)
지난해 12월14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느 남성의 글이 올라왔다. 클럽 ‘버닝썬’에서 위기에 처한 여성을 돕다가 클럽 관계자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