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23일 오전, 필리핀 남부의 마긴다나오 주에 위치한 암파투안 마을로 차량 6대가 들어섰다. 어디선가 무장 괴한 100여 명이 나타나 차에 타고 있던 58명을 납치해 살해했다. 그중 32명이 지역 신문과 방송국의 기자·카메라맨이었다. 여성의 경우, 살해당하기 전 성폭행을 당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건의 배후로 안달 암파투안 마긴다나오 주지사가 지목되었다. 그는 이스마엘 망우다다투 불루안 시 부시장이 주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할 때부터 철회를 종용하며 협박해왔다.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망우다다투의 주지사 후보 등록을 위해 길을 나섰다 변을 당했다.

하루 동안 숨진 언론인 숫자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피고인이 약 200명, 증인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 암파투안 주지사 일가 사람들도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금세 풀려났다. 재판은 더뎠고, 용의자 수십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면서 지역 검찰이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도 흘러나왔다.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암파투안 테러 사건은 필리핀의 언론 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사IN 윤무영레이먼드 빌라누바 필리핀 기자협회 사무총장이 살해당한 언론인들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필리핀 언론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고 은퇴한 뒤 현재 언론자유센터(CMFR) 이사로 있는 루이스 테오도로는 “죄를 지어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게 필리핀의 문화이고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언론자유센터는 1989년 언론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다. 언론 보도를 모니터링하고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대상을 감시한다. 이들은 1986년 4월부터 현재까지 살해당한 언론인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놓았다. 웹페이지에 들어가면 살해당한 언론인의 사망 장소가 지도에 일목요연하게 표시되어 있다.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저널리스트 157명이 살해되었다. 죽임을 당한 기자의 이름, 매체명, 사망 장소, 날짜 등의 정보도 함께 표시된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지역 언론 종사자다. 90%가 업무와 연관된 죽음이었다. 지역 정부의 부정부패나 범죄와 관련된 기사를 쓰다가 원한을 사 보복을 당했다. 지역 경찰, 정부, 군인 등 권력집단이 배후로 의심받았지만 처벌까지 이어진 사례는 드물다.

필리핀의 언론 환경은 늘 자갈밭이었다. 1970~1980년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지만 글로리아 아로요 전 필리핀 대통령 시절에는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책임 있는 행사’로 바꾸려고 했다. 최근에도 같은 시도가 되풀이되고 있다. 기자에게 ‘자격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두테르테 정부는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향해 가짜 뉴스를 생산한다고 몰아세우거나 세무조사를 벌인다. 지난 1월 갑작스러운 법인 등록 취소로 위기를 맞은 〈래플러〉를 비롯해 〈베라파일〉 같은 매체는 정부가 생산하는 가짜 뉴스의 유통을 가까스로 방어하고 있다. 필리핀 기자협회(NUJP)의 레이먼드 빌라누바 사무총장은 “같은 임기 동안 다른 대통령보다 많은 저널리스트가 죽었다.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가짜 뉴스를 만들고 그걸로 협박하는 게 특징이다. 언론인의 죽음을 정당하다고 말한 것부터가 최악이다”라고 말했다.  

‘저널리스트 안전 가이드’에 담긴 내용은?

필리핀 기자협회가 만든 ‘저널리스트 안전 가이드’ 매뉴얼에는 취재와 관련해 구체적인 지침이 나와 있다. 현장에 갈 때는 출구를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거나, 가방을 쌀 때 어떤 걸 챙겨야 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조언한다. 이 매뉴얼은 안전에 취약한 필리핀 언론 환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필리핀 사회에서 기자는 위험하고 월급이 적은 직업으로 인식되어 있다. 테오도로 언론자유센터 이사는 “미디어와 관련된 학과가 전국에 100개 이상 있지만 기자를 지원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다”라고 말했다.

열악한 근무 조건이 종종 정치권과 언론의 결탁을 부추기기도 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말하는 ‘부패한 언론인’의 탄생 배경이다. 마닐라에서 만난 언론 종사자들은 그래도 필리핀이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들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타이, 베트남의 경우 언론이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테오도로 이사는 “필리핀의 경우, 언론 자유를 위해 어쨌거나 싸우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다. 최소한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낼 수는 있다”라고 말했다. 남은 과제는 언론인들의 연대라고 그는 강조했다. 빌라누바 필리핀 기자협회 사무총장도 희망을 말했다. “(지금처럼 마약전쟁 등으로) 사람들이 많이 죽으면 저널리스트 역시 죽는다. 언론과 사회의 수준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그걸 막기 위해 누군가는 할 일을 해야 한다. 위험이 있는데도 이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나 조금씩은 있어왔다.”

기자명 마닐라/글 임지영 기자·사진 윤무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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