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1년차에 첫 번째로 취재했던 재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파기환송심이었다. ‘파기환송심’은 1심, 2심, 그 뒤 대법원에서 이루어지는 3심을 거쳐 다시 하급법원으로 내려온 재판이다.
이런 나도 재판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재판에서는 검사와 변호사가 아니라, 검사와 판사가 싸웠다. 검사가 증거를 제시하고 원세훈 피고인의 범죄를 입증하는 주장을 펼치면, 재판장이 마치 변호사처럼 검찰 측 논리를 따졌다. 재판장이 엉뚱한 소리를 할 때도 많았다. 검사에게 다음 재판까지 ‘A를 준비해오라고 해놓고 B에 대해 묻는’ 일이 반복됐다. 오죽하면 검사가 법정에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고 할 정도였을까.
그때 그 판사의 이름이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온다. 서울고등법원 김시철 부장판사이다. 검찰 사법 농단 수사팀은 원세훈 파기환송심 정식 재판 시작 전에 김 부장판사가 무죄 취지의 판결문을 작성한 정황을 파악했다. 김 부장판사는 검사가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면 이를 무마시키는 내용을 덧붙여 무죄 취지 판결문 초안을 계속 ‘업데이트’했다고 한다. 이에 항의해 갈등을 빚던 주심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인사 조치를 요청한 사실도 확인됐다. 어쩐지, 갑자기 배석판사 중 한 명이 바뀌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원세훈 파기환송심은 2년간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다 재판부가 바뀌고 나서야 끝이 났다. 새로 온 재판부는 원세훈 피고인을 국정원 댓글 개입 사건의 총책임자로 인정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김시철 부장판사의 재판 진행에 목청을 높이며 항의하던 한 검사는 현재 서울중앙지검 사법 농단 수사팀에 속해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어떤 정의는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게 돼버렸다. 대법원 선고를 기다리는 동안 강제징용 피해자 다수가 세상을 떠났다. KTX 여승무원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직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웠던 시간도 되돌릴 수 없다. 김시철 부장판사는 “논거 정리는 파기환송심 재판부의 당연한 업무”라며 원세훈 피고인에 대한 무죄 취지 판결문 작성 의혹을 해명했다. 얼마 전에는 검찰의 압수수색이 위법하다는 글을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올리기도 했다. 그가 사법 농단으로 침해된 허다한 사람들의 권리도 한 번쯤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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