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6일 있을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충격적인 두 건의 증오범죄(hate crime)가 벌어졌다. 10월27일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유대교 회당에서는 백인 극우 남성이 총을 난사하여 유대교인 11명이 숨졌다. 또 그보다 하루 전인 26일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법무장관 등 반(反)트럼프 인사를 겨냥한 동시다발적 파이프 폭탄 소포를 연달아 발송한 혐의로 또 다른 백인 극우 남성을 체포했다. 트럼프는 잇따라 발생한 두 건의 증오범죄를 “정신이상자의 행동”으로 즉각 비난하고 나섰지만, 그 자신이 미국을 증오범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트럼프와 트럼프 현상에 대한 책이 쏟아져 나왔다. 〈아사히 신문〉 뉴욕 특파원인 가나리 류이치의 〈르포 트럼프 왕국〉(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7)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2015년 11월14일부터 2016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일까지 장장 1년 동안, 트럼프에게 몰표를 준 러스트 벨트(rust belt:한때 제철업과 제조업이 융성했으나 쇠퇴해버린 오대호 주변의 공업지역)의 트럼프 지지자를 물밑 취재한 수작이다. 일본 대형 언론의 저력과 지은이의 취재력이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어느 면에서는 편향적이다.
트럼프 현상을 분석한 많은 논자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과거의 풍족한 삶이 끝날지 모른다. 저소득층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미국 백인 중류계급의 반란이 트럼프를 당선시켰다고 말한다. 이런 설명은 〈르포 트럼프 왕국〉의 주조음(主調音)이자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백인의 불안을 특별 취급하는 이런 설명은 백인 우월주의를 은밀히 승인한다. 러스트 벨트는 물론이고 미국 전역에서 제조업이 퇴조하며 가장 먼저 작업장에서 퇴출된 이들은 흑인이다. 매슈 데스먼드의 〈쫓겨난 사람들〉(동녘, 2016)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전역 도시에서 일어난 이 같은 경제의 변화는 흑인 노동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흑인 노동자 가운데 절반은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진짜 고통을 받는 계층은 정치적 셈법에 가산되지 못했다.
〈르포 트럼프 왕국〉은 백인 중산층을 결집시키는 데 트럼프의 노골적인 인종 혐오 선동이 감점은커녕 승점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중 인종뿐 아니라 이슬람교와 여성, 성소수자, 신체장애자, 이민 노동자를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트럼프의 이런 태도는 계산된 것이며 한층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 사회에 위화감을 느끼는 지방의 백인 고령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트럼프의 당선이 혐오 선동을 잘 이용했던 결과, 트럼프 당선 직후 미국 전역에서는 유색인종과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범죄가 보란 듯이 기승을 부렸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중에 백인 우월주의자 집단인 ‘큐 클럭스 클랜(KKK:Ku Klux Klan)’의 지지를 공식적으로 거절하지 않았다. 민주당·공화당 가릴 것 없이, 보통 정치인이라면 어마어마한 문제가 되었을 이 추문은 ‘워낙 돌연변이고 비주류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트럼프를 비껴갔다. 그 결과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미국의 백인 인종주의자들에게 증오범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는 잘못된 보증인이 되었다. 2017년 8월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에서 벌어진 백인 우월주의자 궐기는 남부연합기·KKK 휘장·나치 깃발로 뒤덮였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을 편들었다.
탈진리·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시대
켄 윌버의 〈켄 윌버, 진실 없는 진실의 시대〉 (김영사, 2017)는 ‘트럼프와 탈진리(post-truth) 세계’라는 원제가 명시하는 것처럼 트럼프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그동안 아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트럼프 현상을 설명해왔지만, 이 책은 여느 트럼프 관련서와는 크기가 다르다. 지은이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 트럼프 시대를 위치해놓았다. 의학과 생화학을 전공한 뒤 심리학·종교·영성으로 방향을 전환한 지은이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탈진리 세계’의 원인을 포스트모더니즘, 특히 프랑스 철학에 전가한다.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라캉과 같은 대단히 저명한 포스트모더니즘 저자들 거의 모두의 메시지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는 없다’이다. 보편적인 도덕의 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어떤 진리나 가치가 보편적인 것이라거나 모두에게 참되고 소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은 위장된 권력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진리는 없다’는 식의 무(無)관점적인 광기는 동기부여적인 힘들로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거론된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 이런 비판에 굴복하거나 타격을 입을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이지만, 대중에게 표피적으로 소비된 프랑스 철학의 영향은 지은이가 꼬집은 그대로 나타났다. 대중은 영향력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엘리트’들로부터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탈진리의 문화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토록 많은 ‘개소리’와 자아도취적 현시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탈진리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탈진리 또는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시대에 대해서라면 올해 출간 30주년 기념판이 새로 나온 월터 J.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문예출판사, 2018)도 중요하게 참조할 만하다. 지은이는 인간의 의식 또는 사고방식을 기원전 1500년 무렵 알파벳이 발명된 시기를 기점으로 ‘구술문화(oral culture)’와 ‘문자문화(literate culture)’ 시대로 나누었다. 전자는 감정적이고 임기응변적이며 부족을 설득시키는 국지성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분석적이고 고정적이며 세계 보편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지은이가 구술문화적 특성을 인간의 정체성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놓치기 때문에, ‘전자문화(electronics culture)’가 되불러온 제2의 구술문화를 단지 기술적인 문제로만 치부한다. 다시 말해 트위터·페이스북·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소통망을 잘 관리하기만 하면 탈진리와 가짜 뉴스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옹의 암시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늘 감정과 부족을 기본으로 활동해왔다. 트럼프는 그러한 인간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이용했기에 이 시대 최고의 ‘트위터 스타’는 물론 미국 대통령 자리까지 꿰찰 수 있었다. 전자문화가 인간의 정체성을 더 잘 구현해주기는 하지만, 도구는 이 문제의 원인도 해결책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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