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서율은 확연한 하향세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2017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를 보면 1년간 일반 도서 1권 이상 읽은 사람이 59.9%로 조사 이래 최저치라고 한다. 이상하다. 전국에 개성을 앞세운 독립서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유료’ 독서 커뮤니티도 빠르게
성장 중이다.
독서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마케팅에서 흔히 말하는 8대 2의 법칙(20% 고객이 매출의 80%를 만듦)이 출판계에도 통용되는 것일까? 그럼 어떤 사람들이 쇠퇴하는 독서 문화 속에서 꿋꿋이 자기 취향을 만들어가며 독서를 ‘중독’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일까? 픽션이지만 웹툰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처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예명으로 부르며 요즘 읽는 책과 독서 취향, 책 고르는 법 등 독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중독자들답게 허들이 높다. 1회에 당당하게 등장한 캐릭터 ‘노마드’는 자기소개 중 자기 계발서를 읽는다고 말했다가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
독서중독자들은 자기 기준에 미달하는 책이나 사람은 가차 없이 ‘처단’한다. 저자 소개를 펼쳤는데 어린 시절부터 자기 인생사에 대해 주절주절 일기장처럼 늘어놓는 책은 곧바로 탈락이다. 번역서인데 저자보다 역자의 약력 소개가 길어져도 아웃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은 당연히 쳐다보지도 않는다.
독서중독자들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있다. 다과에 마들렌이 나오자 회원들은 서로 눈치를 살핀다. 마들렌을 먹으며 어린 시절 추억으로 빠져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대화에 오를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유명한 책은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책이기도 하다. 회원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화제에 오를 때 어떻게 대화를 회피하고, 어떻게 대화 주제를 다른 책이나 저자로 옮길 것인지 머릿속으로 전략을 짜기 바쁘다.
책에 대해 다루는 웹툰이라고 해서 진지한 작품일 거라 생각한다면 명백한 오해다. 이 작품의 본질은 개그물이다. 그것도 B급 개그. 주인공 ‘경찰’의 이야기는 영화 〈무간도〉의 줄거리를 차용했는데, 황당한 전개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사회 부적응자 냄새 풍겨도 매력적인 사람들
책이라는 ‘고급’ 소재의 개그 만화라는 점도 신선하지만 더 미묘한 재미는 이 작품이 독서중독자들을 칭찬하는 것인지, 공격하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책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중독자들은 사실 친구도 없고, 성실한 납세자도 못 되는 사회 부적응자 냄새를 솔솔 풍긴다. 그럼에도 이런 독서 모임이 있다면 꼭 참여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있다.
이 외에 작품에서 언급되는 좋은 책이 많을뿐더러, 독서 방식이나 책을 고를 때 참고할 만한 유용한 팁도 많다. 타인의 독서 습관을 엿보는 즐거움도 있다. 재미와 교양을 동시에 잡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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