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 어느 네팔인이 세상을 떠났다. 본명 미누드 목탄. 1972년생. 1992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15일짜리 관광 비자를 들고 김포공항에 내린 이후 마흔일곱 해 삶 가운데 18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한국에서는 본명보다 ‘미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의 부음을 알리는 소식은 짧았지만, 먹먹함은 길고 깊었다.

그는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다. 노래로, 미디어로 이주노동자의 애환을 전했다. 2003년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대량 단속하자 다른 나라 친구들과 ‘스톱크랙다운(Stop Crack Down:단속을 멈춰라)’이라는 록밴드를 결성해 리더로 활약한 것이 계기였다. 2004년부터는 MWTV(이주민 방송)의 진행자로 일하며 이주노동자의 삶과 애환을 전했다. 이주노동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현장은 물론, 한국 사회 약자들의 싸움터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2009년 10월23일 집 앞에 잠복해 있던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단속돼 강제 추방당했다. 한국에 산 지 17년8개월 만이었다. 당시 미누의 강제 추방이 언론에 오르내리자 법무부는 이례적으로 보도 자료를 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자이툰 부대 철군 집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등 정치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는 이유였다.

ⓒ양철모 제공2008년 11월 마석 가구공단에 있는 이주노동자 자취방에서 노래하는 미누(왼쪽).

법무부 스스로 이주노동자는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 지배층의 시각이었다. 강제 추방 직후 미누는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팔에서 태어났지만, 삶의 터전은 한국이다. 지금도 한국의 나무·거리·음식 모든 게 그립다. 그래서도 나는 한국이 좋은 나라가 되길 바란다. 여러 인종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나라 말이다.” 자신을 강제 추방한 한국에 섭섭함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한국의 문화운동, 사회운동가들은 미누를 스스럼없이 ‘내 친구’라고 불렀다. 그가 강제 추방되었을 당시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고미숙씨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쏟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시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한 건물 구석에는 그가 잡혀가기 직전까지 일하던 MWTV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건물에는 ‘수유+너머’ ‘나눔의 집’ 등 몇몇 단체가 세 들어 있는데, 미누 씨는 이곳에서 발군의 요리사였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식당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살려 사람들에게 밥을 먹였다. 특히 무채 써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가 마음먹고 네팔 음식을 만드는 날은 잔칫날 같았다. 특별한 날이면 ‘깜짝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흥겹게 하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당시 그와 함께 활동한 한 문화운동가는 “운동판에서 만난 사람 중 꼭 닮고 싶은 이를 한 명만 꼽으라면 미누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감수성 넘치는 ‘딴따라’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그를 알고 지낸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는 2003년 11월 이주노동자 대량 단속에 항의해 시작한 성공회 성당 농성장에서 본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농성장 분위기가 묘했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말도 안 통하니까 구호 외치기도 어려웠다. 그때 한국말에 익숙한 미누가 먼저 나서서 자기 이야기를 술술술 하는데, 그게 바로 노랫말이 되더라. 그 노랫말에 곡을 입혀 함께 부르면서 분위기가 나아졌다.”

스톱크랙다운의 대표곡 가운데 ‘베트남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다. ‘휴일엔 찾아온 고향 친구들/ 입에 맞는 음식에 소주잔을 부딪치며 마음을 달래는 수다··· 또다시 찾아온 휴일 유독 조용하게 다가오네/ 두런거리는 말소리 박스 테이프 포장 소리/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작업복 입은 채로 잡혀갔다네/ 이제는 볼 수 없는 베트남 아가씨’라는 내용이다.

옆방에 이사 온 베트남 아가씨가 어느 날 갑자기 강제 추방당한 뒤 그녀의 친구들이 빈방에서 짐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 미누가 만든 노래다. 실제로 이주노동자가 강제 추방당하면 친구들이 빈방을 찾아가 짐을 챙겨 보내주곤 하는 현실을 노랫말로 만든 것이다.

지난 9월 열린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된 〈안녕, 미누〉의 한 장면. 밴드 스톱크랙다운의 네팔 공연 모습.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 미누

그는 세상의 아픔과 공명하는 활동가이기도 했다.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한국의 비정규 노동자 등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마이크를 잡았다. 봉제 공장에서 일할 때 그는 한 달에 200만~300만원은 벌 수 있는 솜씨 좋은 일꾼이었다. 하지만 그는 돈 대신 운동을 택했다. 이란주 대표는 어느 농성장에서 미누에게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데, 모든 걸 바치지 말고 자기 미래도 좀 준비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농성장에는 죽어간 이주노동자 영정 사진이 있었다. 미누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자꾸 날 쳐다보는 것 같아요. 저 사람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없어요.”

미누와 기자가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것은 2015년 네팔 대지진 때였다. 당시 그는 네팔 현지에서 ‘수카와티(축복받은 땅)’라는 작은 시민단체를 만들어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헌 옷 등을 모아 판 돈으로 빈민을 도왔다. 당시 그는 카트만두에서 ‘김치사랑’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며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고 있었다.

미누의 마지막 모습은 한 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지혜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미누〉다. 지난 9월 DMZ 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미누는 “나 이제 죽어도 돼, 한이 없어”라고 말한다. 올해 초 꿈에 그리던 스톱크랙다운 친구들이 네팔을 찾아와 함께 공연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누가 마이크를 잡고, 미얀마 출신 소모뚜가 기타를 치고, 한국인 송명훈이 드럼을 쳤다. 한국에서 공연할 때마다 꼭 끼었던 ‘빨간 목장갑’도 등장한다. 빨간 목장갑은 그에게 노동자의 상징이었다.

영화에서 미누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한국 식당에서 일할 때 전라도 출신 아주머니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노래였다. 18년을 산 한국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아니, 우리에게 그는 무엇이었을까. 안녕, 미누.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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