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에 대한 백낙청의 인식은 여성학자 정희진이 어느 계간지에 발표한 글에서 “한국의 진보 진영은 계급의식보다 성차별 의식이 훨씬 ‘뛰어나다’. 다른 말로 하면 ‘남성은 계급이고, 여성은 젠더’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라고 쓴 것을 떠올리게 한다. 백낙청의 ‘남성은 민족운동’과 정희진의 ‘남성은 계급의식’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진보 남성의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여성운동을 부수적이고 주변적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백낙청의 평론집 제목에 떡하니 박혀 있는 ‘인간해방’이라는 큰 글자는 무척 흥미롭다. 인용해놓은 백낙청의 글을 보면, 인간 속에는 여성이나 여성해방이 근본에서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은 앙드레 말로의 대표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원제(La Condition Humaine)에는 분명 ‘인간’이 들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전적으로 남성을 가리킨다. 이 작품에 나오는 남성 주인공들은 모두 내면과 외면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여성 주인공들은 그저 육체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성의 육체는 남성이 역사에 투신하기 위해 넘어서야 하는 악조건으로 정의된다.
말로, 사르트르, 카뮈의 ‘인간’은…
“여자들이 꼿꼿이 선 채로도 그들이 바라는 찬사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다지 자주 침대에 눕지는 않을 테죠. 그 찬사를 얻기 위해서 그들에게 침대가 필요한 것이니까.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를 거부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해야만 합니다. 행동, 행동만이 인생을 정당화하고 또 백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도 오직 행동뿐이니까요. 인간이란 그의 행동의 총화이지, 별것 아닙니다. 그가 이미 한 일과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의 총화이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동주의 작가 말로는 사르트르와 카뮈에게 실존주의의 문을 열어준 작가로, 사르트르와 카뮈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말로의 시대가 있었다. 그는 10여 년 후에 나온 두 사람의 문학적 영웅이었다. 그렇다면 사르트르와 카뮈의 인간은 말로의 그것과 달랐을까. 거의 같았다. 실존주의자들에게도 남성은 여성보다 더 실존주의적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남성 비평가와 작가들의 남성 동성 사회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된 인간을 온전하게 회복하려는 여성주의 연구자들이 생겨났으며, 옛 정전과 고정된 해석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새로 보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내가 난생처음 읽은 페미니즘 도서인 송명희의 〈여성해방과 문학〉(도서출판 지평, 1983)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해방이나 여권운동은 흔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서구의 근대 문화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운동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한국 사회에서 여권의식이 태동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서구 근대 문화의 일방적인 영향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자생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은이는 두 차례의 왜란(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란(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여성의 사회적 인식과 위치도 크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장끼전〉 〈가루지기 타령〉은 조선 초기부터 엄격하게 명문화된 여성의 전통적 정절관에 반기를 들며, 〈이춘풍전〉 〈정수경전〉 〈박씨전〉 〈춘향전〉 등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하고 있다. 이런 해석 혁명은 여성주의를 서구에서 건너온 외래 풍조(“침략적인 외세의 도구”)라고 말하는 백낙청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여성주의 문학 비평은 세 가지 층위의 시간에서 전투를 벌인다. 첫째(과거), 정전이 된 남성 텍스트와 상대적으로 지워진 여성 텍스트를 복원한다. 둘째(현재), 여성 불평등을 지탱하는 구조와 권력의 소재를 밝힌다. 셋째(미래), 새로운 젠더를 구축하면서 온전한 인간상을 구상한다. 권보드래 외 12명의 여성주의 연구자들이 펴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은 여성주의로 한국 현대문학사를 새로 창조하려는 가장 최근의 결과물이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보는 한국 문학사는 밀려난 비남성에 주목한다. 정전화된 남성적 리얼리즘을 질문하고, 역사적·문화적으로 구성된 남성성의 안팎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남성(성)의 소설사를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라는 지배적 허구에 관한 텍스트로 재해독함으로써 한국 문학은 더 많은 텍스트들, 더 많은 가능성들과 조우할 수 있다. 남성성을 곧 성적 억압의 중추이자 적대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서 더 나아가, 남성성 역시 역사적 담론 구성체라는 점을 구명해야 한다. ‘남성성의 신화’를 해체할 때에야 비로소 한국 문학(사)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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