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속어 중에 “판사는 미뤄서 조진다”는 말이 있다. 재판 일정을 질질 끌어서 당사자의 피를 말린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청와대를 상대하는 관료는 어떨까? 이들은 판사 이상으로 역설적인 전략을 쓴다. 관료는 기어서 조진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1년을 갓 넘길 때쯤, 청와대의 한 실무자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부처들이 자잘한 것까지 청와대가 결정을 해달라고 한다.” 그 실무자는 “귀찮아 죽겠다”라고 말은 하면서도 관료들이 설설 긴다는 1년차 권력을 실감하는 눈치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했고 지금은 국회에 입성한 한 여당 의원에게 이 얘기를 들려줬다.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게 관료한테 당하는 전형적인 코스야.”

ⓒ시사IN 양한모

무슨 뜻일까. “청와대는 국정의 비전과 노선을 정하고 그걸로 관료를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데 관료들이 디테일을 자꾸 들고 온다. 사소한 것까지 결정해달라니까 내가 엄청 힘이 세다고 느낀다. 그게 결국은 다 내가 챙길 사업이 된다. 거기 매몰되다 보면 진짜 싸움은 시작도 못 해보고 임기가 끝난다.” 관료들이 청와대에 납작 엎드릴수록, 사소한 디테일까지 일일이 결재를 받아갈수록, 청와대는 이 묘한 구도에 갇힌다. 

문 대통령이 야당 시절 문제의식을 가졌던 어느 사업이 정권교체 후에도 궤도 수정이 없었다. 알고 봤더니 해당 부처가 ‘에이스’를 청와대로 파견 보내 그 사업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물론 그 사업에는 부처 관료들이 은퇴 후에 갈 ‘자리’가 걸려 있었다. 청와대가 온 나라의 문제를 다 떠안게 되면 어지간한 규모의 국책사업도 행정관 한 명 담당 업무에 그친다. 이런 구도에서 ‘어공(어쩌다 공무원)’과 ‘늘공(늘 공무원)’이 디테일로 경쟁하면, 늘공을 이길 어공은 사실상 없다. 디테일은 관료의 전장이다.

어공은 어공의 무기로 싸워야 한다. 그러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관료 조직은 청와대가 아니라 장관이 책임지고 컨트롤하는 게 순리다. 장관이 실질적 인사권을 갖고 실·국장 자리에 관료 사회 밖에서도 인재를 데려다 쓸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이게 거의 막혀 있다. 장관이 부처를 움직일 권한을 갖게 되면, 청와대는 비전과 노선에 집중해 움직일 수 있다. 여기가 어공의 전장이다. 정권의 명운이 갈리는 곳도 결국 여기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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