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서 ‘먹방’이 대세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남북 화해의 분위기에 맞춰, 이젠 평양 맛집 탐방까지 화면에 등장한다. 시청률 측면에서 ‘맛’의 권력은 점점 더 커져간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맛이 권력이지 않았던 적이 잠깐이라도 있었나 싶다. 누구나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맛은 막대한 부의 원천이었기에, 권력과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바다에 처음으로 몸을 던진 사람들 역시 그 권력을 추앙하는 이들이었다.

인터넷에서 ‘정향’이라는 향신료를 검색해보자. 300g 한 통에 8000원이니, 100g이면 2700원 정도 하는 셈이다. 나는 이 숫자를 볼 때마다 감격하곤 한다. 200여 년 전의 유럽이었다면, 100g당 560만원이 넘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Google 갈무리정향(위)은 잡냄새를 없애고 고급스러운 향을 낸다.

정향은 유럽에서는 가장 비싼 향신료로 대접받았다. 15세기 포르투갈에선 1㎏이 금 7g과 맞먹었고, 200년 후 영국에선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로 거래되었다. 이 엄청난 향신료의 고향은 바로 인도양과 태평양이 맞닿는 곳에 있는 몰루카 제도다. 이 일대의 섬들은 오랜 시간 ‘향신료 제도(Spice Islands)’라고 불렸다. 정향 말고도 육두구, 시나몬 등 유럽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열 배, 스무 배의 가격을 받을 수 있는 품목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지역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는 해양 강국들의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승자는 포르투갈이었다. 1498년 바스코 다가마의 함대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한 이래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꾸준히 동방으로 향했다. 이 일대 섬들을 자국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확실한 현금이 되는 향신료의 산지가 포르투갈 영역으로 넘어갔기에, 스페인은 몸이 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스페인 왕실을 설득해 항해에 나선 이가 바로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영어식으로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라고 불리는 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포르투갈 출신인 그는, 젊을 때 인도를 거쳐 향신료 제도에 가본 경험이 있었다. 당시 지리적 지식과 항해 기술을 종합해, 그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도 향신료 제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1519년,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선원 260명과 배 다섯 척을 이끌고 항해에 나섰다.

결코 쉽지 않은 항해였다. 남미 대륙의 끝을 찾아 갈팡질팡하는 사이,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나 다수를 처형해야만 했다. 배 한 척은 대열에서 이탈해 돌아가버렸다. 겨우 태평양에 접어드는 데 성공해 필리핀까지 갔지만, 여기서 마젤란 자신은 원주민들의 분쟁에 개입하다 목숨을 잃었다. 3년이 걸린 항해 끝에, 살아남은 선원 18명과 배 한 척이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처참한 실패처럼 보이지만, 향신료 제도에서 선창 가득 싣고 온 정향 덕분에 이 항해에 투자했던 스페인 왕실은 손실을 보전하고 오히려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들의 항해는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로 기록된다. 이후 수많은 뱃사람들이 항로에 도전했고, 그 결과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마젤란이 지은 ‘그 이름’처럼 평온하기를

출항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무렵, 마젤란은 유서를 썼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까지 했을까마는,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길은 이렇듯, 자기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고, 그를 따르는 이들 때문에 넓어진다.

대통령이 평양 시민 15만명 앞에서 연설을 했다. 끝마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길을 떠나고 넓혔던 두 전 대통령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아무쪼록 그렇게 이어진 항로가, 마젤란이 처음 보고 이름 붙였던 바다의 이름 ‘태평양’처럼 평온하기를 기원한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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