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현 변호사)은 양승태 사법부 ‘재판 거래’ 의혹의 핵심 길목에 있다. 차관급 고위 법관이었던 그에 대한 혐의는 법원행정처 처장을 지낸 박병대 전 대법관 등과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으로 이어진다. 유 전 연구관에 대한 수사가 중요한 이유다.

법원은 유 전 연구관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적극 ‘방어’한다는 의심을 샀다. 유 전 연구관 사무실에 대해 세 차례 청구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했다. 그사이 유 전 연구관이 관련 자료를 파기했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 또한 기각했다(아래 표 참조).


유 전 연구관의 자료 파기는 증거인멸 논란으로까지 이어졌다. 법원이 제 식구를 감싼다는 눈초리를 사는 것을 넘어, 수사를 방해한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압수수색영장 심사를 사흘이나 끌면서 증거를 인멸하도록 시간을 벌어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시사IN〉 제576·577호 ‘대법원 신뢰도 확 떨어졌다’ 기사 참조). 법원은 영장 기각 사유에도 이례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며 유무죄 판단까지 담았다.


〈시사IN〉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당시 정황을 좀 더 상세하게 파악했다. 현 법원행정처는 유 전 연구관이 대법원 연구관으로 재직하며 입수한 자료 수만 건을 외부로 반출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도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3차 압수수색영장이 9월7일 접수돼(법원은 9월8일 0시30분에 영장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법원은 사흘 동안 시간을 끌며 9월10일에야 결론을 냈다. 법원행정처도 느리게 움직였다. 대량으로 법원행정처 자료가 유출되었다는 사실관계 파악에만 사흘이라는 시간을 썼다. 대량의 자료 유출에 현 법원행정처가 보인 둔감한 반응은, 수석재판연구관의 자료 유출이 관행처럼 이뤄진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게 만들었다.

사건 당시로 되돌아가 보자. 9월3일 검찰은 유해용 전 연구관의 사무실에 대한 1차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의료진 박채윤씨 특허소송 자료를 청와대로 빼돌렸다는 혐의였다.

ⓒ연합뉴스9월20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법원은 재판 거래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사법행정’과 ‘재판’이 분리되어 있다는 논리를 폈다. 사법행정은 법원행정처가, 개별 사건은 각 법원 재판부가 맡기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었던 그에 대한 혐의는 이러한 방어 논리를 무너뜨렸다.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은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 전체를 살핀다.

그 일을 맡았던 유해용 전 연구관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관련 문건을 건넸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물증이 나온 것이다. 허경호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딱 이 한 건에 대해서만 압수수색을 허용했다. 검찰은 9월5일 유 전 연구관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재판 거래 정황이 담긴 자료를 무더기로 확인했다.


검찰은 바로 다음 날 2차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다. 9월6일 영장을 심사한 이언학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영장을 기각했다. 자료 확보를 위해, 검찰은 곧바로 대법원에 고발 요청을 했다. 비공개로 취급되는 재판 과정 등의 자료를 현직 변호사인 유해용 전 연구관이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대법원이 백혜련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현 법원행정처는 전날인 9월6일 접수된 검찰의 고발 관련 공문을 수령한 후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하려 했다.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기획심의관은 9월7일 금요일 저녁 6시 유해용 전 연구관의 사무실로 전화했다. 직원이 그가 없다고 하자, 9월10일 월요일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윤리감사기획심의관이 퇴근한 이후에 유 전 연구관이 윤리감사관실로 회신을 했다. 전화를 받은 법원 담당자는 월요일(9월10일)에 통화하라고 했다.

같은 날 법원행정처는 ‘검찰이 이미 수사를 개시했기에 고발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검찰은 이튿날인 9월7일 3차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다. 사흘 뒤인 9월10일 월요일에야 심사를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일부러’ 영장 심사를 늦춘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주말에 근무한 두 영장전담 판사 중 한 명은 이미 유 전 연구관 관련 영장을 기각한 전례가 있어 심사하기에 부적절했고, 나머지 한 명은 다른 업무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끝에 9월10일에 영장 심사를 맡은 박범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통합진보당 소송 관련 1건만 압수수색이 가능하다며 나머지는 모두 기각했다.

같은 날 오후 5시30분 법원행정처의 윤리감사기획심의관이 유해용 전 연구관의 사무실로 협조 공문을 팩스로 보냈다. 30분 후 유해용 전 연구관과 통화해 공문을 보냈다고 알리며, 유출한 각종 서류의 목록을 제출해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그제야 유 전 연구관은 자료를 없앴다고 밝혔다. ‘검찰의 1차 영장 집행(9월5일) 후 2차 영장 청구가 기각(9월6일)된 후 종이 출력물은 파쇄했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분해해 버렸다’고 했다. 법원행정처는 저녁 8시10분쯤 검찰에다 이를 통보했다.

전례 없이 긴 구속영장 기각 사유서

검찰은 증거인멸 행위라고 반발하며 9월20일 유해용 전 연구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같은 날 저녁 영장은 기각됐다. 허경호 부장판사는 전례 없이 긴 구속영장 기각 사유서를 내놓았다. 200자 원고지 18.1장에 달했다. 총 6가지 혐의 중 5가지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자료를 들고 나간 것은 맞지만 비밀이 아니라는 등의 이유였다.

검찰은 반박 성명을 냈다. “그동안 영장판사는 재판 관련 자료가 ‘재판의 본질’이라 압수수색조차 할 수 없는 기밀 자료라며 영장을 기각했다. 그런데 똑같은 재판 관련 자료를 두고 비밀이 아니니 빼내도 죄가 안 된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모순적 행태이다.”

대법원은 자료 반출 등에 대한 규정이 있느냐는 백혜련 의원실 질의에 “법원 공무원 및 법관의 임명 퇴임 시에 자료 반출에 대한 규정이나 규칙은 없다. 관련 보안 서약서 등도 작성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미 퇴직한 고위 법관들을 현행법으로 처벌하기 힘들다는 점을 시사한다. 재판 거래 의혹 수사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지만 난항이 예상되는 지점이다. 백혜련 의원은 “대규모의 자료를 유출하고 이를 파쇄하고도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직 고위 법관과 이를 감싸는 법원의 행태가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더욱 무너뜨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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