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는 한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바쿠·트빌리시·예레반 천관율 기자
  • 호수 578
  • 승인 2018.10.18 16: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월16일부터 26일까지 11일 일정으로 <시사IN>이 주최하는 ‘코카서스 3국 인문기행’이 열렸다. 이 행사에 참가한 천관율 기자가 코카서스 역사를 배경으로 인문학적 여행기를 전한다.

지도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계지도와 지구본만 쥐여주면 몇 시간이든 넋을 잃고 빠져들 수 있는 아이들이 있는 이유다. 이 여행기에는 코카서스가 자랑하는 그림 같은 풍광도 이색적인 문화도 나오지 않는다. 지도가 들려주는 상상력과 역사가 주인공이다. 9월16일부터 26일까지 11일 일정으로 <시사IN>이 주최하는 ‘코카서스 3국 인문기행’을 다녀왔다. <시사IN>은 독자들과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 ‘함께 걷는 길’ 시리즈를 계속 선보이고 있다.

코카서스(현지명 캅카스)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일대를 부르는 이름이다. 가운데 걸친 코카서스 산맥을 기준으로 위쪽을 북코카서스, 아래쪽을 남코카서스라고 부른다. 북코카서스는 러시아 영토다. 분쟁 소식으로 귀에 익은 체첸이 여기에 있다. 남코카서스에는 코카서스 3국으로 묶어 부르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이곳이 이번 인문기행의 무대다.

코카서스는 특히 한국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땅이다. 왜 그럴까. 세계지도를 보자. 유라시아 대륙의 상단 전체를 러시아라는 대제국이 뒤덮고 있다. 마치 유라시아의 뚜껑처럼 보인다. 이 광대한 육상제국은 19세기부터 당대의 해양제국과 숙명적 대결을 펼쳤다. 처음에는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이 상대였다. 이 대결을 19세기에는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불렀고 20세기에는 ‘냉전’이라고 불렀다.

ⓒ시사IN 천관율러시아는 18세기에 코카서스를 1차 정벌하면서 군사도로를 닦았다. 1783년 도로 건설 200주년을 기념하는 벽화가 그려진, 코카서스 산맥 전망대 풍경.

제국들의 영향권이 겹치는 지역에는 지정학적 단층이 생긴다. 한반도가 그렇다. 러시아(20세기에는 소련)의 영향력과 미국의 영향력이 중첩되는 이 땅에서 단층은 남북한 분단을 만들어냈다. 지정학적 단층의 구속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한반도 주민들은 70년째 느끼고 있다. 이제 이 관점을 그대로 유지한 채 초점을 세계지도의 동쪽으로 쭉 옮겨보자. 거기에 코카서스가 있다.

코카서스 역시 제국들의 영향력이 겹치는 지정학적 단층이다. 근대 초부터 이 지역은 위로 러시아 제국, 아래 왼쪽으로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 일대), 아래 오른쪽으로 페르시아 제국(현재의 이란 일대)이 교차하는 단층선이었다. 19세기부터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 지역에 발을 들인다. 이제 다시 세계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코카서스가 데칼코마니처럼 보인다. 세계 경영에 나선 제국들이 어지럽게 오갔던 유라시아의 두 육교다.

마당에 가정용 석유 시추기가 있는 나라

코카서스의 중요성은 19세기에 극적으로 도약했다. 석유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 코카서스에서 카스피해로 뾰족 튀어나온 반도에 있는 도시다. 이곳은 예로부터 불붙는 기름과 가스가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불의 도시’로 불렸다. 13~14세기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바쿠에서 사람들은 연못에서 불을 길어 올린다”라고 썼다. 9월17일, 다른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풍경과 만났다. 평범한 가정집 마당에 무심히 펌프질을 하는 석유 시추기가 보였다. 가정용 석유 시추기라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시민의 눈에 이만한 충격도 흔치 않다.

미국의 한 사업가가 1859년에 최초로 땅을 파서 석유를 캐내는 데 성공한 이후로, 석유는 서서히 고래기름과 석탄을 대체해나갔다. 1870년대부터 바쿠는 세계 최고의 석유 도시로 우뚝 선다. 노벨상으로 유명한 노벨 가문이 바쿠의 석유로 부를 쌓은 집안이다. 바쿠는 한때 세계 석유 소비량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했고, 유조선과 송유관 등 석유 산업의 큰 혁신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바쿠를 지배한 러시아는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떠올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을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바쿠의 석유가 없다면 소비에트는 유지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긴다.

 

ⓒGooglemap 갈무리유라시아 지도를 보면, 코카서스와 한반도는 육상제국과 해양제국이 충돌하는
단층선에 있는 두 육교처럼 보인다(위). 코카서스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지정학적 요충지다(왼쪽).

바쿠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제국의 무덤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 제3제국을 패퇴시킨 도시가, 따지고 보면 바쿠다. 히틀러는 전쟁을 이기려면 우크라이나의 밀과 바쿠의 석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 시기에 석유는 사실상 모든 내연기관 무기에 들어가는 전쟁의 혈액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깨트리고 소련으로 진군한다. 히틀러의 군대는 스탈린그라드 (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이 전투가 2차 대전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에서 모스크바로 진군했다면 들를 필요가 없었지만, 이 도시는 바쿠로 가는 길목에 있다.

석유를 전쟁의 혈액으로 만든 역사적인 결단은 1911년 영국에서 나왔다. 해군장관으로 부임한 윈스턴 처칠은 영국 해군 함정의 에너지원을 석탄에서 석유로 바꾼다. 석유 배는 더 빠르고, 더 손이 적게 가며, 바다에서 더 오래 버틴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석탄은 영국에 흔했지만 석유는 없었다. 이제 제국들은 전쟁의 혈액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했다.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러려면 석유 수송로인 바다를 지배해야 했다. 해군이 석유에 의존하기 때문에, 바다를 지배하려면 석유를 지배해야 했다. 제해권과 석유는 이렇게 해서 한 몸으로 얽힌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이때부터 패권국가란 곧 바다와 석유의 지배자를 뜻했다. 바다와 석유를 갖지 못한 제국의 운명은 스탈린그라드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운명으로 히틀러를 끌어들인 도시가 바쿠다.

 

ⓒValentin Ramirez1853년 크림전쟁 당시 세바스토폴 전투의 가상화. 크림전쟁(1853~1856년)은 러시아가 영국·프랑스·오스만 제국 연합군과 벌인 전쟁이다.

석유는 제국들의 운명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산유국의 운명도 극적으로 바꾼다. 9월18일 아제르바이잔을 떠나 이웃 나라 조지아로 넘어가는 길. 이른 아침 바쿠를 출발한 버스가 뜬금없는 교통통제에 걸렸다. 30분 넘게 영문 모를 통제로 도로를 텅텅 비워놓더니, ‘높으신 분들’이 탄 듯한 검은 세단 몇 대가 몇 겹의 경찰 호위를 받으며 유유히 지나갔다. 차량들이 분노의 경적을 울리든 말든 경찰은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 그래도 되는 나라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는 2003년부터 5년 임기 대통령을 세 차례 지냈고, 올해 4월 대선에서는 7년 임기 대통령으로 네 번째 당선됐다. 부인은 부통령이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3연임 금지 헌법과 5년 임기 헌법을 모두 자기 손으로 바꿨다. 아버지인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옛 소련 시절부터 실질적인 아제르바이잔의 통치자였으니, 부자를 합쳐 집권 기간이 50년쯤 된다.

바쿠는 화려한 도시다. 카스피해 해안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올림픽을 개최한 적 없는 나라에 올림픽 주경기장도 있다. 석유의 힘이다. 정작 시설들을 이용하는 내국인들이 안 보인다. ‘쇼윈도 도시’ 같다. 도심을 빠져나가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민둥산에 벽돌집들이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다. 되는대로 올린 집들 특유의, 들쭉날쭉하게 산을 잡아먹어 올라가는 모습이 어지럽다. 학교와 병원은 기대할 것도 없고, 상하수도조차 있을지 의심스럽다. 극과 극, 두 개의 바쿠를 만나는 데 차로 15분이면 충분하다. 뜬금없는 교통통제만 없다면.

 

ⓒAP Photo1994년 12월11일, 기갑부대를 앞세운 러시아군이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돌격했다.

왜 석유는 독재자의 나라에서만 나올까. 왜 하필 올림픽을 유치하기도 전에 주경기장부터 짓고 보는 독재자에게 이런 행운이 돌아가서, 주민들의 삶은 판자촌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까. 세계적인 개발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이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일깨워준다. 순서가 반대다. 독재자의 나라에서 석유가 터지는 것이 아니라, 석유가 터지는 나라에서 독재자가 승리하기가 더 쉽다. 저서 <빈곤의 경제학>에서 콜리어는 이것을 ‘천연자원의 덫’이라고 부른다.

덫은 이렇게 작동한다. 보통 독재자들은 독재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세금으로 재정을 충당하려면 경제 발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결과로 중산층이 형성되면, 이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독재자는 종말을 맞는다. 한국의 박정희가 그랬다. 하지만 석유를 가진 독재자는 중산층을 만들 필요도 없다. 알리예프 대통령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는 극단적으로 말해 납세자가 필요 없다.

천연자원은 경기변동에 민감하다. 최근 5년만 놓고 봐도 국제 유가는 최고 106달러와 최저 26달러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서부텍사스유 기준). 국가 재정의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이 극히 떨어지고, 엘리트들은 내일이 없는 예산 쟁탈전에 돌입한다. 법치와 시스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가 중요해진다. 정실주의가 등장한다. 정실주의는 선거 경쟁의 문법도 바꾼다. 복잡하고 어려운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것보다 유권자를 매수하는 게 간편하다.

저개발국가에서 석유는 독재자의 친구

 

 

 

ⓒ시사IN 천관율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있는,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공원 전경. 아르메니아인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아라라트 산이 보이는 자리에 있다.

 

이 모든 덫이 작동할 때, 민주주의의 핵심 기둥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진다. 저개발국가에서 석유는 독재자의 친구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는 말은 한국의 불운을 묘사하는 흔히 듣는 문장이었다. 바쿠는 저개발국가에서 석유야말로 불운의 원천일지 모른다고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는 한국이 받은 축복이었을지 모른다.

석유는 코카서스라는 케이크 위에 올라간 체리다. 중요하고 눈에 띄지만, 본질은 아니다. 석유 시대 이전에도 코카서스는 지정학적 단층이었다. 이런 단층은 너무나 큰 에너지를 품고 있어서 때로 파괴적 혁신을 만들어낸다. 코카서스는 유럽 변두리 제국 러시아를 세계 제국으로 변신시킨 땅이다. 우리가 아는 러시아는 코카서스에서 태어났다.

다시 세계지도다. 코카서스 왼쪽에는 흑해가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목숨줄이 걸린 바다다. 19세기 러시아의 최대 수출품은 밀을 비롯한 곡물이었다. 수출 물량의 3분의 2나 되었다.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흑해 북쪽에 있다)에서 생산된 밀은 흑해를 출발해 지중해로 빠져나가 유럽 각국으로 수출된다. 전체 곡물 수출량 중 흑해 바닷길이 최대 85%까지 차지했다. 흑해가 외국 함대에 봉쇄된다면 러시아는 수출의 절반 이상이 한순간에 증발할 운명이었다. 흑해에서 지중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인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는데, 이 길목 역시 러시아의 생명선이다.

이 일대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는 영국·프랑스·오스만 제국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 크림전쟁(1853~ 1856년)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흑해를 중립 해역으로 돌린다는 조약에 동의해야 했다. 치명적인 후퇴였다. 농노제가 존속할 정도로 토대가 후진적이던 러시아 제국은, 이 충격적인 패배로 붕괴 위기에 몰렸다.

근본적 위기는 근본적 방향 전환을 만들어냈다. 크림전쟁 패배 이후, 러시아 군부의 몇몇 장교들은 코카서스의 전략적 중요성에 눈을 뜬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방위선은 유럽과 맞닿아 있는 서부 국경이다. 그런데 크림전쟁 이후로, 영국이 코카서스를 육교 삼아 남쪽에서 치고 올라와 뒤통수를 때리는 공포가 러시아 군부를 휩쓸었다. 영국은 당대 최대의 부를 만들어내는 인도를 장악하면서 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이었다.

젊고 전략적 시야가 새로운 야전 장교들을 중심으로 코카서스, 러시아어로 ‘캅카스 정벌론’이 힘을 얻는다. 크림전쟁 직후 엉망이 된 국내 환경을 무릅쓰고 러시아는 군사 원정에 나서서 코카서스 산맥 이북을 다시 복속시킨다. 아주 중대한 전략적 의미가 있었다. 첫째, 한발 밀려난 흑해의 서안을 장악하여 흑해에 다시 영향력을 행사할 기반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가 더 중요하다. 인도에서부터 북상해오는 영국에 맞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해나갈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중앙아시아는 기후·식생·문화가 유럽과는 판이한 미지의 지역이었다. 정복을 시작할 거점이 필요했다. 세계지도는 코카서스가 안성맞춤의 거점이라고 알려준다. 카스피해를 수송로 삼아 중앙아시아로 군대를 보낼 발판이다.

왜 중앙아시아가 중요했을까.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 한 칸만 남진하면 곧바로 인도다. 영국의 사활이 걸린 지역이다. 크림전쟁 연합군의 실질적 수장은 영국이었다. 영국이 러시아의 급소 흑해를 찔렀듯 러시아도 영국의 급소 인도를 찔러야 했다. 러시아의 눈에 흑해와 인도가 하나의 그림, 영국과의 숙명적 대결이라는 그림으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인도의 영국군과 전쟁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영국의 목줄을 지그시 누를 자리를 확보하면 충분하다. 그게 중앙아시아였고, 그러려면 코카서스라는 육교가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는 유럽의 변두리 제국에서 진정한 유라시아 제국으로 변신을 시작한다. 코카서스를 거점으로 중앙아시아에 진출하고 인도를 압박하자는 기획을 내놓은 일련의 젊은 군인 그룹을 ‘캅카스 장교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러시아의 눈을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돌리게 만든 것은 러시아 역사의 중대한 전환으로 꼽힌다. 코카서스에서 러시아는 ‘세계 제국의 눈으로 지도를 보는 법’을 빠르게 익혀나간다. 이 시기에 복속한 중앙아시아 영토가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이다.  

19세기 영국은 ‘러시아 공포증’에 시달렸다.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 일대(당대에는 수십 개의 전근대 국가들과 숫자도 셀 수 없는 소수민족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에서 러시아와의 경쟁에 밀릴 때마다 내각이 퇴진하고 정권이 교체되는 소동이 일었다. 마치 한국 정치가 대북 압박정책과 교류정책을 놓고 주기적인 노선 투쟁을 겪은 것처럼, 영국 내각의 운명도 러시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시기 코카서스·중앙아시아· 인도를 둘러싸고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려는 양국의 치열한 물밑 암투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른다. 서로에게는 총 한 발 쏘지 않은 대결이지만 양국 모두 여기에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느꼈으니, 19세기 버전의 냉전이라 할 만하다.

러시아의 힘이 강할 때는 영향권이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남코카서스까지 내려왔다. 러시아가 물러날 때는 코카서스 산맥까지 밀려났다. 소련이 붕괴하자 코카서스 3국은 나란히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산맥에서 더 밀려나는 것은 거부했다. 산맥 북쪽의 체첸 민족이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는 두 차례에 걸친 체첸 전쟁으로 응수했다. 이것이 소련 붕괴 이후의 신생 러시아가 ‘세계지도를 보는 법’이었다. 그들에게 코카서스 산맥은 최후 방어선이었다.

1999년 당시 깜짝 발탁된 신출내기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 2차 체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미지 덕에 유력 차기 주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2000년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푸틴은 “나의 역사적 사명은 북캅카스(체첸이 있는 지역)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코카서스는 러시아의 급소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귀환’을 세계에 알리는 2014년 동계올림픽을 코카서스의 흑해 연안 도시 소치에서 개최했다.

조지아는 러시아가 후퇴할 때 영향권 밖으로 빠져나온 나라다. 국호로 그루지야를 썼던 이 나라는 독립 이후 친미 노선을 천명하고 영어식 명칭인 ‘조지아’로 이름을 바꿨다. 조지아는 선거 때면 친미 노선과 친러 노선의 대결이 핵심 쟁점이다. 현지인 가이드 니노는 대통령 후보에 대해 물을 때마다 “친미다”와 “친러시아다”를 제일 먼저 말했다.

조지아 지도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글이 제공하는 조지아 지도에는 국경 말고도 굵은 점선으로 표시된 지역이 둘 있다. 흑해 연안의 점선 구역이 압하지야, 북쪽 국경 코카서스 산맥 인근의 점선 구역이 남(南) 오세티야다. 둘 다 소수민족 거주 지역으로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요한 예외다. 조지아가 친미 노선으로 돌아서자, 러시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독립을 후원하면서, 자유무역협정과 군사기지 대여 조약을 맺었다. 사실상 국가 대우를 한 것이다. 러시아는 이를 통해 조지아를 압박하는 동시에 코카서스 산맥 남쪽으로 다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19세기 ‘캅카스 장교들’이 그렸던 전략 구상은 21세기에도 살아 있다.

조지아의 점선 지도는 한반도와 코카서스의 결정적 차이를 드러내준다. 한반도는 비교적 단일한 민족국가가 지정학적 구속력에 의해 강제 분단된 지역이다. 여기서는 단일민족 의식과 분단 구조가 충돌해 모순과 갈등을 만들어낸다. 코카서스는 정반대다. 수십 개에 달하는 복잡한 민족 구성에,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양대 종교가 교차하면서 복잡성은 통제 불능 수준으로 높아진다. 이 지역을 거쳐간 모든 제국은, 현지 정권을 분열시킬 소수민족 파트너를 쉽게 발견했다.  

‘체르케시아’는 왜 지도에서 사라졌을까

이런 지역에, 국민국가 프로젝트를 먼저 완성한 서구 열강들의 경쟁이 옮겨붙는다. 열강들의 눈에, 여러 민족들이 뒤엉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안보 위협이었다. 국민국가끼리 총력전을 벌이는데, 종교와 인종이 다른 소수민족이 우리 국경 안에 있다? 언제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의미다. 동유럽이나 코카서스처럼 인종 구성이 복잡하고 뒤섞여 있는 지역에서 이런 긴장감은 비극으로 번지기 쉽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소치는 러시아의 부활을 선언하는 도시였으나, 19세기에는 이슬람권 소수민족인 체르케스인이 살던 도시였다. 러시아 제국은 코카서스 정벌(러시아는 캅카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후에 이 일대의 소수민족들이 두고두고 안보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러시아가 선택한 답은 ‘인종 청소’였다. 러시아는 체르케스인들을 같은 이슬람권인 오스만 제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교통편도 제공하지 않고 무작정 흑해 해안으로 밀어내 알아서 배를 잡고 떠나도록 했다. 체르케스인의 90%가 고향을 떠났고, 그들의 나라인 ‘체르케시아’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민족들이 뒤엉켜 살던 코카서스에 국민국가들끼리의 경쟁이 옮겨붙을 때, 인종 청소는 아주 그럴듯한 해법이었다. 1·2차 세계대전처럼 경쟁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는, 인종 청소 역시 극단으로 치닫는다. 강제 이주 수준을 넘어 조직적인 학살이 결합한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아르메니아인들이 민족의 발원지로 신성하게 생각하는 아라라트 산을 굽어보는 자리에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공원이 있다. 기독교계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영토이자 지금의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일대에 살고 있었다. 1915~1916년,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강제 이주의 끝에 집단 학살이 있었다. 아르메니아가 추산하는 규모는 150만명에 달한다. 반면 터키는 강제 이주 과정에 20만명 규모의 희생자가 나왔으나 조직적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공원은 한반도에서 온 여행자를 상념에 빠지도록 만든다. 한반도와 무척 닮은 지정학적 단층 코카서스는, 여행의 마지막 순간에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의 복잡성이 낳은 결정적인 차이를 아픈 역사로 증언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세계가 아르메니아 학살을 잊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을 마음 놓고 기획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공원 옆에는 학살 박물관이 있다. 복도 한 면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1939년에 했다는 말이 적혀 있다. “요즘 누가 아르메니아 학살을 말하기나 하나?”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