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어떤 대책도 통하지 않는 총체적 난국에 봉착했다. 아르헨티나의 통화인 페소는 지난 4월 중순부터 폭락하기 시작했다. 올해 초(1월2일 1달러에 18.4페소)에 비하면 9월 중순 현재(9월17일 1달러에 39.55페소) 미국 달러 대비 50% 이상 떨어진 상태다. 외국인들이 아르헨티나에 심어뒀던 자산(주식·채권·부동산)을 팔아치우며 그 자금을 해외로 유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아르헨티나에 보유한 땅을 1000만 페소에 매각했다고 가정하자. 미국에 송금하려면 그 1000만 페소를 25만3000달러(9월 중순 환율 기준)로 바꿔야 한다. 이렇게 ‘페소를 팔아’ ‘달러를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페소 공급 증가, 달러 수요 증가) 페소 가치가 떨어지는 반면 달러 가치는 치솟는다. 페소 가치가 폭락하는 만큼 아르헨티나로 수입되는 완성재와 중간재의 가격은 올라가고, 물가인상률 역시 가파르게 상승한다. 최근 아르헨티나의 물가인상률이 30%를 넘어섰다. 외국인들이 주식·채권·부동산을 팔아치우면서 아르헨티나의 자산 가치는 폭락했다.
일반적으로 자국 통화의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 늘어나야 한다.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페소짜리 아르헨티나산 초콜릿이 미국에 수출되는 경우, 올해 초에는 1달러에 거래되었다. 페소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진 지금은 0.5달러에 팔린다. 하지만 2016년 하반기부터 적자였던 아르헨티나의 무역수지는 여전히 적자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다른 나라와 상품·서비스를 사고파는 거래에서 받아야 할 돈보다 줘야 할 돈이 훨씬 많다는 의미다. 더욱이 다른 나라 업체와 결제할 때는 자국 통화(페소)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권위 있는 돈(달러)’을 줘야 한다. 이를 위해 아르헨티나 기업들은 중앙은행에서 페소를 달러로 바꿔야 하는데, 중앙은행에도 달러가 부족한 경우가 있다. 이른바 외환위기다. 해외 거래자에게 달러를 주지 못하게 되면 교역이 끊어지고 이에 따라 국민경제 전반이 마비될 수 있다.
물론 외국과의 상품·서비스 거래 외에도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외국인이 아르헨티나에서 발행된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등을 구입하는 경우다. 이른바 ‘외국인 투자’. 외국인들이 달러를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에서 페소로 바꾼 뒤(달러 공급 증가, 페소 수요 증가) 투자하게 되니까 페소 가치가 상승한다. 외국인들의 달러를 받고 페소를 내준 중앙은행에서는 외환보유고가 증가한다. 그러나 현실의 외국인들은 아르헨티나에 달러를 들고 오기보다는 빼가고 있을 뿐이다. 즉, 아르헨티나는 무역 거래에서나 자산 거래에서나 모두 적자를 보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페소 가치의 하락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래야 외국 자본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투자를 재개할 것이다. 만약 환율이 달러당 40페소라면, 2만 달러로 80만 페소 상당의 아르헨티나 기업 주식을 매입할 수 있다. 그런데 페소 가치가 이후 달러당 80페소까지 내려가리라 예상된다면, 그 외국인은 이 시점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기다리기만 하면 불과 1만 달러로 80만 페소어치의 아르헨티나 주식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르헨티나가 달러화로 갚아야 할 채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통화가치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예컨대 2만 달러의 채무를 갚으려면 80만 페소(달러당 40페소)면 되는데, 페소 가치가 절반(달러당 80페소)으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160만 페소를 동원해야 한다. 아르헨티나가 내년에 갚아야 할 외채가 무려 249억 달러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페소 가치 유지’에 사활을 걸고 여러 가지의 극한 수단을 감행해왔다. 우선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외환보유고)로 페소를 사들였다. 달러를 대규모로 매각하고 페소를 사들이는 것이므로, 달러 대비 페소 가치의 인상을 기대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올해 들어 시장에 내다 판 외환은 모두 130억 달러에 달한다(지난 7월 현재 외환보유고는 모두 513억 달러). 기준금리를 올리는 방법도 있다. 높은 수익률을 찾아 달러를 들고 지구 전역을 헤매는 글로벌 유동 자본들에게 ‘아르헨티나 자산을 사면 초고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올해 초 27.5%였던 기준금리를 지난 4~5월에 걸쳐 40%까지 올렸다. 지난달 중순에 다시 45%로 인상하더니 2주 뒤인 8월30일에는 60%로 15%포인트나 단번에 올려버렸다. 소비자와 기업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살인적 금리다. 실물경제가 어떻게 되든 일단 통화가치부터 안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급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달러 매각이든 초고금리든 페소를 구하지는 못했다.
또 하나의 수단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르헨티나가 ‘총알(구제금융)’을 확보했기 때문에 빌린 돈이나 결제 대금을 떼먹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을 해외 거래자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난 6월 IMF로부터 500억 달러를 빌리기로 하고 1차분인 150억 달러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IMF에 나머지 350억 달러를 빨리 달라고 독촉했는데, 그때마다 자금 이탈이 오히려 가속화하면서 페소 가치가 떨어지는 이변이 발생했다. 시장이, ‘IMF 자금을 받으니 상황이 좋아지겠다’가 아니라 ‘지금 돈이 없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미국 연준의 두 차례 금리 인상이 영향 미쳐
더욱이 IMF는 돈을 빌려줄 때마다 엄혹한 조건을 내건다. 공기업 매각, 공무원 해고 및 임금 삭감, 연금 삭감 등을 통해 정부 지출을 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빌려준 돈을 엉뚱한 데 쓰지 말고’, 경제 및 복지 시스템을 ‘돈 갚기에 적합한 구조’로 바꾸라는 의미다. 이왕 빌려주기로 약속한 달러를 한꺼번에 내주지 않는 것도 구제금융 조건을 이행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다.
이런 압박에 따라 지난 9월 초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비상조치’를 선언했다. 주된 내용은 교통·전기 등 공공서비스 보조금 삭감, 19개 정부 부처 통폐합으로 공무원 수 절반 축소, 농업 수출품에 대해 달러당 4페소 세금 부과, GDP의 1.3%로 예정된 내년 ‘근본 적자(primary deficit:세입-세출)’ 0%로 조정 등이다. 최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아르헨티나 주요 도시에서는 이런 초긴축정책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크리 정부의 긴축정책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내기 위한 자구책이지만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이 나라 실물경제를 마비시킬 수밖에 없다. 대다수가 총수요를 극적으로 줄이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인 3분의 1 이상은 이미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터키, 브라질,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신흥 발전국들이 급격한 자국 통화 절하와 자본 이탈, 물가 인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는 올 상반기에 이미 두 차례나 기준금리를 올려 신흥 발전국들에 투자되어 있던 자금을 빨아당겼다. 신흥국발 금융위기론이 최근 위세를 떨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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