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평양 공동선언’에 담긴 북한의 비핵화 방안은 보기에 따라 미흡할 수 있다. 미국이 그동안 요구해온 ‘핵 리스트’ 신고에 대한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지난 7월6~7일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때보다 후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북한 측은 풍계리 핵 실험장이나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폐기 등 선조치에 대해 미국이 상응조치(종전선언)를 하면, 추가적인 비핵화 조치를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현재 핵’에 대한 신고 및 폐기 절차다. 북측이 당시 제시한 ‘현재 핵’은 영변의 5㎿ 원자로와 원심분리기 같은 핵시설과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 같은 핵물질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평양 공동선언에서는 추가 조치 내용이 달라졌다. 플루토늄이나 우라늄 등을 의미하는 핵물질에 대한 언급이 빠진 대신 5㎿ 원자로와 원심분리기를 포함하는 ‘영변 핵시설’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또한 자신들의 선행 조치 중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의 폐기 과정에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영변 핵시설 폐기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영변에만 핵시설이 370~390여 개가 있다. 트럼프 정부가 이것만 폐쇄시켜도 인류 역사상 이렇게 방대한 성과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9월18일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3차 남북 정상회담 공식 환영식이 열렸다.

영변 핵시설은 엄밀하게 말하면 핵폭탄 제조용 핵물질을 생산하는 곳이다. 그 자체가 핵물질은 아니다. 또 미국이 요구하는 핵무기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폼페이오 장관 3차 방북 당시 미국 측은 핵시설과 핵물질까지 폐기하겠다는 북한의 제안조차 부족하다고 했다. 이미 만들어서 가지고 있는 핵무기에 대한 신고 리스트 작업까지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논리는 간단하다. 핵물질은 당장 폐쇄가 가능하다 해도 핵시설 폐쇄는 몇 년이 걸릴지 몇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이 기간에 북한이 기존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고 있으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과거에도 몇 차례 핵시설에 대한 사찰 검증 과정에서 마찰이 발생해 원점으로 돌아간 사례가 있다. 그때마다 북한이 가동 중단됐던 원자로를 재가동해 미국이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됐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이 요구하는 종전선언은 한번 선언해버리면 뒤로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성격을 띤다. 미국은 기존 핵무기의 신고 절차에 들어가야 종전선언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전문가들은 평양 공동선언에 담긴 북한의 비핵화 방안보다 여기에 담겨 있지 않은 내용에 주목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양 공동선언의 의의를 폄하하지 않는다. 남북 합의에 처음으로 북한 비핵화 방안이 구체적으로 언급됐고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육성으로 언급했다. 평양 공동선언으로 한국은 단순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지위로까지 격상됐다. 다만 지금 정도의 북한 측 안으로는 미국의 요구 수준을 맞출 수 없다고 본다. 7월 이후 미국 조야에 형성된 대북 불신과 강경 분위기와도 격차가 크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9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평양 공동선언에 담긴 내용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실무 협상을 담당해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도 “실제 얘기된 내용은 훨씬 많다”라고 말했다. 핵문제 성격상 북·미 협상이 주 무대이고 남북 대화는 북·미 협상을 위한 맛보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평양 공동선언을 지난 2007년 2·13 합의에 비유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포괄적인 합의가 이뤄진 다음 2007년 2월13일 주로 영변 5㎿ 원자로 등 핵시설의 신고와 불능화에 대해 합의(2·13 합의)가 이뤄졌다. 2007년 10월3일 이를 좀 더 심화하는 합의가 이뤄졌다(10·3 합의). 이번에도 ‘현재 핵’ 분야를 나누어 평양 공동선언에서는 핵시설에 대한 내용만 담은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나머지 핵물질에 대한 내용은 9월24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보따리 속에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원하는 핵무기 목록 신고는 문 대통령이 언질을 주고 북·미 협상의 장으로 넘길 가능성이 있다. 핵 신고 문제야말로 당사자끼리 다시 만나 정확하게 의견을 나눠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평양 공동선언이 알려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도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리용호 외무상과의 회동을 추진하는 등 발 빠른 반응을 보였다. 또 폼페이오 장관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스티브 리건 대북정책특별대표와 북한 대표 간 실무회담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종전선언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

9월24일 한·미 정상회담과 북·미 간 실무 접촉을 통해 북한의 복안이 보다 자세히 드러날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전개된 상황만으로도 몇 가지 쟁점은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종전선언에 대한 내용이다. 평양 공동선언에는 종전선언 문구가 없다. 제5조 2항에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 조치를 취하면’이라는 문구에 간접적으로 언급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의 상응 조치란 폼페이오 3차 방문 당시와 마찬가지로 종전선언임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종전선언의 내용은 바뀌었다. 폼페이오 3차 방중 당시 북한이 요구한 종전선언은 남·북·미·중이 모두 참여하는 4자 종전선언이었다. 지난 9월5일 대북 특사 방문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을 포함하는 4자 종전선언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한·미 동맹이 약화된다거나 주한 미군을 철수해야 된다는 우려들은 종전선언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김 위원장은 자신은 트럼프 대통령을 신뢰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내에 북·미 간 적대 관계 해소와 북한 비핵화를 달성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이 더 많은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4자 종전선언을 고집하던 북한이 중국을 제외한 남·북·미 3자 종전선언으로 다시 복귀하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으로서는 김 위원장이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9월19일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 공동선언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4·27 판문점 선언까지만 해도 북한은 종전선언 참가국에 대해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이라며 여지를 두었다. 그러나 5월7~8일 김정은 위원장의 다롄 방문(2차 방중)을 계기로 중국을 포함하는 4자 종전선언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한이 절실하게 원하는 대북 제재 해제에 관해 시진핑 주석이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제재를 풀지 않아도 앞으로 중국이 실질적으로 풀어줄 수 있다고 시 주석이 약속한 것이다. 지난 4월20일 경제 집중 노선을 선언한 이후 초조해하던 김정은 위원장에게 단비와 같은 얘기였다. 그 뒤 김 위원장은 중국과 보조를 맞추었다.

3월5일 특사단 방북 당시 약속했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 수용 입장을 철회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중국의 북핵 해법인 ‘쌍중단(雙中斷)’의 실질적 목표였다.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한·미 연합훈련을 동시에 중단하자고 주장해왔다. 그 뒤 열린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3자 종전선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해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의 쌍중단 목표를 직접 관철시켜준 셈이다.

그러자 시진핑 주석의 목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바로 쌍궤병행(雙軌竝行) 관철이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병행하자는 것이다. 중국이 말하는 평화체제의 핵심은 바로 주한 미군 철수와 한·미 동맹 약화다. 북한 비핵화 문제는 복잡하기 때문에 중국이 주장해온 쌍궤병행에 따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6·12 싱가포르 회담 직후 시진핑 주석의 지론이 되다시피 했다. 중국이 쌍궤병행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전선언에 참여해야 했다. 종전선언에 참여해 비핵화 협상을 지연시키고 이를 미국의 통상전쟁이나 타이완 문제에 대항하는 방패로 쓰려는 게 중국의 전략이었다. 실제로 지난 6월19~20일 이뤄진 김 위원장 3차 방중 당시 양국은, 북·미 비핵화 협상을 서두르지 않으며 비핵화 과정에서 주한 미군의 감축 내지 철수를 관철한다는 합의를 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9월5일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의 특사단에게 종전선언이 주한 미군 철수나 한·미 동맹 약화와 무관하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는 중국이 종전선언에 참여해 자신들의 쌍궤병행 의도를 관철하려 할지라도 중국 편에 서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또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비핵화를 달성하겠다고 밝혀, 비핵화 과정을 질질 끌려던 중국과 보조를 달리했다. 미국이 4자 종전선언에 거부감을 보인 것은 ‘미국 대 남·북·중’의 1:3 구도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제는 중국이 오히려 ‘역 1:3’ 구도를 우려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9월12일(현지 시각) 시진핑 주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 전체회의 좌담에서 “지금 한반도 문제의 당사국은 북한과 한국, 미국”이라며 “(중국은) 그들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과정을 진행하는 데 협조하겠다”라고 말했다. 중국이 사실상 4자 종전선언 요구에서 한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주석의 9·9절 방북 무산 영향은

북한이 종전선언 문제에서 중국에 등을 돌린 것은 시진핑 주석이 9·9절 방북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진핑 방북은 북한이 폼페이오 방북과 경쟁을 붙여가며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사안이다(〈시사IN〉 제573호 ‘9월9일 시진핑 주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기사 참조).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4차 방북을 중단시키며 중국의 대미 수출 2000억 달러어치에 대한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자, 중국은 시진핑 방북 카드를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9·9절 특별대사로 서열 3위인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보냈다. 시진핑 주석이 방북하면 대북 제재 해제와 경제 지원에 대한 확고한 약속을 기대했던 북한으로서는 허망했다.

 

ⓒ평양 사진공동취재단4월27일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대화하고 있다.

결국 특사단 방북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은 4·27 판문점 선언 당시 남·북·미 구도라는 ‘초심’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한·미 대 북·중’이라는 대결 구도에서 중국이 떨어져 나간 만큼 한국의 중재 역할에 대한 기대감 역시 높아졌다. 평양 공동선언 제5조 3항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라고 명시한 대목도 북한의 이런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바라는 것도 명확해졌다. 대북 제재 완화다. 주한 미군 철수나 한·미 동맹 약화와 종전선언이 무관하다며, 종전선언을 남·북·미 3자의 정치선언으로 격하시켰다. 미국이 응하기 쉽게 문턱을 낮춘 셈이다. 그 대신 핵 신고 목록 제출과 대북 제재 완화를 맞교환하는 것을 협상의 실질적 목표로 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그동안 ‘남·북·미 구도’에서 ‘북·중 협의’로 넘어가는 등 줄타기를 한 것도 제재 완화의 기회를 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제재 완화나 경제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이제 미국과의 담판밖에 없다. 협상의 타이밍은 미국 중간선거 직전인 10월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중간선거가 끝나면 트럼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북한은 문 대통령의 방미로 시작되는 일련의 대미 교섭에 사력을 다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이제 본 게임을 앞둔 오픈 게임이 막 끝난 셈이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시작한 한반도 비핵화의 대드라마가 한·미 정상회담, 북·미 실무회담을 거쳐 남·북·미 3자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이를지 주목된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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